시선은 언제나 폭력이 될 수 있다. 시선-강간은 엄연한 범죄다.
고 작은 눈깔만으로도 상대의 생각이며 마음까지 모조리 좀 먹는 가공할 범죄를 짓는 말종들이 그야말로 ‘판을 치는’ 세상이다.
H동 반지하 전셋방에 살던 시절. 샤워를 하고 나오던 찰나, 현관 옆 작은 창문으로 집안을 세세히 들여다보는 집주인 노친네를 본 적이 있다. 그는 평소에도 종종 마당으로 난 창문에 대고 방 안의 나에게 소리를 질러 말을 걸곤 했다. 나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집에 있는 동안 그 창문의 커튼을 걷지 않았다. 4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때 샤워를 마친 내가 문 밖에서 나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 짧은 순간 밖에 비친 사람의 형상을 보고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러지 못했더라도, 그 노친네는 적당한 변명이나 핑계 따위를 찾아야 한다는 어떤 필요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본인 말로 딸 같고 손녀 같다던) 20대 여성의 나체를 창문 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쳐다보고도 사과 한 마디 안 해도 됐으리라. 그때는 그래. 그가 집주인이었고 나는 고작 세입자였으니. 이제 세입자보다는 조금 나은 주인집 딸이 되었으니. 설마하니 내 집에 내가 사는 동안 그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 그 모든 것은 그저 나의 멍청한 안일함이 낳은 결과였을까.
처음 말할 땐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했는데. 그 다음 말할 땐 설마 그래도 했는데. 그러곤 더 많은 이에게 말을 전할 때쯤에는 이미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고. 마지막 엄마에게 사진을 보여줄 때쯤이 돼선. 손이 떨렸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숨이 묘하게 가쁘고.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죽이고 싶었다. 죽일 수 있다면 죽이고 싶어. 두고두고 생각날 테다. 나를 탓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멍청하고 아둔했다고 나를 탓하기도 할 테다. 이 상황을 ‘매끄럽게’ 해결할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토악질이 나게 끔찍하다. 그 침대에서 그가 처음 본 게 내가 아니었다면. 아니면 상황을 짐작할 법한 남자가 창문 밖의 그를 보고 당신 거기서 뭘 하는 거냐고 대단히 화라도 내었더라면. 그러면 그냥 동네에서 흔히 일어날 법한 시덥잖은 일회성 소란 따위로 마무리됐을까. 하나는 확실하다. 성차가 빚어내는 폭력의 가능성은, 심지어 돈이 만드는 권력관계―자본주의 안에서 무소불위와 같은―도 거뜬히 이겨먹을 수 있다.
아주 평범한 악마들이 득시글거리는 헬조선 바닥. 돈만 없는 게 아니라 양심도 수치도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 인간의 존엄이란 한낱 이상에 불과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