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블라인드를 설치하고, 밥을 먹으러 나갔다가, 아무도 먼저 챙겨주지 않을 것 같아 내가 먼저 소리 질러서, 케익을 사서 내 방에 둘러앉았다. 팩와인도 깠다. 엄마랑 긴긴 얘기를 시작했다. 지난 상담의 이야기들. 어렸을 때의 기억, 좀 더 자라서의 기억, 작년의 기억, 한 달여 전의 기억. 힘들었고, 서러웠고, 짜증났고, 화났고, 억울했고, 원망스러웠고, 지겨웠고, 답답했고……. 밀린 숙제를 하듯이 와르르 풀어냈다. 아니 쏟아냈다. 엄마는 가끔씩 고개를 끄덕거리며 얘기를 들었다. 잠깐의 변명이 있었다. 사과를 했다. 미안했다, 미안하다. 사과를 받았다.
돈을 빌렸다. 카드값을 모두 갚고, 카드는 서랍 속으로 쳐넣어버렸다. (잔뜩 쌓여있는 엘포인트와 훗날의 롯백 결제를 위해 카드를 잘라버리진 못했다. 의지가 0.5%쯤은 부족한 탓이다.) 어쨌든 못들고 다니면 결제도 못하니 괜찮을 테다. 쓰면서 방금 생각했는데 앱카드를 지워버려야겠다. 지웠다. 이제 한도 백만 원짜리 카드는 없고, 나는 오로지 체크결제만 쓸 수 있는 인생이다. 소액신용 정도는 최후의 순간을 위해 남겨두자. 어쨌든 목표는,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돈이 없다고, 돈이 모자라다고 돈을 더 벌겠다 마음 먹지 않는 것이 목표다. 없으면 없는 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전전긍긍하지 않는 연습.
텝스 학원에 등록했다. 15만원 정가에 첫 수강 할인을 이것저것 끼워서 13만 2천원을 결제했다. 통장 잔고가 토막났다. 엉엉 슬퍼라. 내친 김에 7월 텝스도 결제했다. 이번엔 기필코 잠을 자느라 시험을 안 가진 않으리라. 첫 수업을 들었다. 끔찍했지만, 어차피 앞으로 올 수많은 날들에 비해서는 오늘이 가장 덜 끔찍했을 것이다. 그러니 괜찮아야만 한다. 엘씨 선생은 나를 짠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껄껄… 괜찮아지겠죠(?)’라고 대답한 까닭에. 그럴 수도 있지 뭐. 숙제가 존나게 많을 테지만, 애들 가르치는 사람이 내가 받은 숙제 많다고 뭐라고 궁시렁거릴 수는 없는 거다. 못 먹어도 고, 이미 시작되어버렸다.
315-2호에서 이 얘기들을 모두 했다. 숙제를 마친 기분이었고, 더 하고 싶었던 얘기는 어떤 거였고(a.k.a. 3대 이론), 돈을 빌렸고, (돈에 관한) 마음가짐을 바꾸기로 했고, 학원을 등록했고, (비록 폐강위기에 처해있지만), 수업을 들었고, 움파룸파 두비두밥. 그랬더니 선생님 가라사대, 한동안은 생각에, 깊이, 고민에 빠져있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네요. 엄마한테 얘기를 한 건 잘 한 일인 것 같아요. 네, 저도 더 참았으면 혼절했을 뻔 했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다시 생각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고, 어느 정도 마음이 정해진 이후에도, 어떻게 말을 꺼낼지, 어떤 이야기들을 해야할지, 정말 이걸 입밖으로 내뱉어도 되는 건지, 한참이나 오락가락 했지만. 어쨌든 얘기를 한번 꺼내고 난 뒤엔, 아, 생각보다는 별 게 아니군, 할 만 한 일이었어, 했습니다.
바쁘지만 할 만 했던 것, 바빴어도 하고 싶었던 것. 바쁘니까 죽을 것 같았던 것, 바쁨이 괴롭고 끔찍했던 것. 둘 사이의 차이는 뭐였을까. 아직 잘 모르겠다.
처음 놀기 시작할 때는, 어느 정도 쉬고 나면, 쉬는 게 지칠만큼 쉬고 난 다음에는 다시 무언가를 할 힘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쉬다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막상 그게 쉼이 되지도 않고, 다시 회복이 되지도 않는 느낌이야. 그러니까 아마도 그건 나에겐 적절치 않은, 틀린 방법이었을 거다. 근데 한편으로는 쉴만큼 쉬어서 더 이상 쉬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지칠만큼’ 쉰 것일 지도. 어쨌거나 이제 놀고 쉬고 아무 것도 안 하고 뒹굴거리고 굴러다니는 일은 적당히 그만해야… 하지만 미련은 여전히 남겠지. 뭐 그래도 ‘그게 뭐든 가만히 있는 건 아니네요.’
박민규가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