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는 지난번 쓴 블로그를 보고 나서는 “요새 잘 안 쓰길래 내가 잘하고 있구나 싶었는데 그놈 때문에!”라고 말해서 나를 웃겼다. 당신이 잘 하는 것과 내가 블로그를 쓰는 게 전혀 상관이 없다고는 말을 못하더라도 블로그를 쓰지 않는다고 당신이 잘 하고 있다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건 더 웃긴 일이었다.
어쨌든 살아 돌아와 생존신고를 하는 것은, 드디어 논문 드래프트를 냈기 때문이다. 와인을 두어 잔 마신 채로 집에 돌아와 발표문을 쓰다가 말고 문득 블로그 생각이 났는데 사실은 내가 뭘 쓰고 싶었던 건 아니고 오랜만에 남 쓴 걸 좀 구경하려는 심산이었다. 페북도 그렇고 인스타도 그렇고 (아주 극히 잠깐이지만) 다 접고 있다가 요며칠 다시 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뭘 썼는지 정말 잘 알 것 같으면서도 정작 발표문을 쓰려고 보니 내가 뭘 쓴 건지 모르겠는 상태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냥 당장 드는 생각은 쿠키런 슬슬 너무 지겹고(이걸 꼭 논문 달리는 즈음에 딱 시작해서 쓰는 동안 열심히(?) 달렸는데 그마저도 웃긴 일이다), 태오 넘나 섹시하고, 피부과를 또 가야하나 싶고, 카드값을 빨리 갚아야겠고, 도수는 빨리 종료하고 운동은 어서 시작하면 좋겠고, 술은 더 마시고 싶고, 내일 일은 하기 싫다는 것이다. 남들은 논문 다 쓰고 이 기분을 어떻게 견뎠을까. 누구라도 막 궁금해하면 좋을 것 같으면서도 아무도 궁금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 아주 복잡미묘한 심리상태이다. 어쩌다보니 드래프트 일정도 나홀로 일정이 되면서 더더욱 다른 코멘트를 들을 일이 없어진 것 같은데 이게 좋다고 해야할지 아니라고 해야할지도 잘 모르겠다.
2주라는 시간은 참 길고도 짧아서 막상 지나버리고 나니 정말 순식간이었던 것 같은데, 지내는 동안에는 마치 다른 사람 인생이라도 된 것 마냥 내가 다른 템포로 살고 있는 게 느껴져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O는 내가 과외를 2주 쉰다는 소식만 들었던 차에 학원은 계속 다니고 있었다는 얘길 듣고 그러고 드프를 어떻게 하냐 하고 놀래주었지만 (그 놀람 자체가 어쩌면 위로의 방편이었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그가 놀라는 게 나에게는 놀라웠다. 이게 무슨 문장인지 내일의 나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지금으로선 주당 16시간 정도 강의를 하면서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논문도 안 쓰고 공부도 안 하고 학교도 안 다니면 일주일에 생산성이 필요한 시간이 16시간뿐인 거니까 나름 고효율이야. (그렇다고 위로하지 않으면 못 버틸지 모른다.) 그러니까 논문도 안 쓰고 공부도 안 하고 학교도 안 다니고 오로지 ‘돈만 버는’ 나는 꽤 워라밸이 좋은 편일 거라서(사실 가장 불안정한 상태이기도 하지만) 남은 반 년은 돈만 벌면서 쉬고 싶다고 생각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졸라 이상하네. 난 왜 항상 돈만 버는 게 쉬는 거냐? 아니, 솔직히 아닐 테지만 그냥 그런 거라고 치자.
어제부터 괜히 목이 잠기고 조금씩 칼칼하고, 이상하게 미열이 좀 있는 느낌이 들고, 집에 있는 체온계는 미친 놈처럼 체온이 와리가리하고, 여하간 좀 무섭고 쫄렸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열두시 좀 넘어 누워놓고 다섯 시에 다시 깨고 그랬다. 잠깐 깨서도 체온을 재고 또 재다가 잠들었다. 다 모르겠고 빨리 그냥 백신 맞고 마스크 벗는 세상 좀 왔으면 좋겠다. 이제는 지겹다는 말로도 부족한 것 같다.
뜬금없지만 B의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이 그 나름의 애정을 담뿍 담고 있을 때 조금 억울할 정도로 그 문장이 좋아지는 일이 있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 또 그렇다. 그치만 나는 역시 안 될 것. 다시금 억울하다. 아무래도 글을 더 쓰긴 글렀고 이제 누워야지.
고생했다 푹 잘 쉬고 있길. 모든 내일을 응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