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18. 03:56

03:56 쓰기 시작한다. 기나긴 하루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맥주안주 준비해 넷플왓챠 고루고루 고르다가 시네마 천국 보았다. 맥주 한 모금에 팝콘 네 움큼씩 주워 먹다가 맥주 다 떨어져 천장 보고 누워 명치께에 노트북 세워놓고 영화봤다. 엔딩 크레딧 올라가기 전 마지막 장면에서 느닷없이 눈물 뚝뚝 흘리며 울었다. 하늘 보고 누워 우면 항상 눈물이 귀로 들어간다. 이 기분 가실 길 없어 엔니오 모리꼬네의 오스트를 듣는다. 여태 내가 그 곡 듣고 시큰둥 그랬던 건 그냥 이 영화 아직 안 봐서였다.

차주 시작되는 열흘 간의 수업을 위해 과외1과 과외2와 과외3 시간을 조정했다. 마치고 여의도 가서 1인분 3.3하는 양구이대창구이 먹었다. 여러 시나리오 있었으나 가장 무난하고 적당하게 종결했다. 불쑥불쑥 오르는 마음 열심히 참았다. 어떤 이야기들은 부러 강하게 전했고, 또 어떤 구석에선 그저 넘겼다. 일견 이상하고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나에게 더 너그럽기로 결심한다.

말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환멸을 느끼면서, 나 역시도 어딘가로든 말을 쏟아부으며 살아간다는 걸 깨달을 때면, 나는 내가 좀 싫어지기도 한다. 여전히 10년 전 죠스님의 그 문장이 선명히 귀에 맴돈다. 언제고 어떤 필요한 순간에, 부질없이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며 고요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내내 다짐한다, 일평생 말로 살아온 이들에게는 언제고 묵언수행의 계절이 필요하다고.

장벽을 뛰어넘게 만드는 교육이라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사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미 모든 종류의 교육들이 장벽을 공고히 하는 데에 적극 부역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했다. 이런 시답잖은 건방을 버는 돈의 삼분지 이쯤 사교육에서 벌어들이는 나년이 뱉고 다닌다는 것은 일종의 블랙코미디 같은 것이다.

그는, 요는 진심과 거부에 있다고 말했다. 나는 내내 그 ‘거부’란 것은 완전하지 않다고 말했다. 부끄러움을 알법한 자와의 대화 역시 이렇게나 구구절절하다. 구구절절함을 떨치고 싶을 때가 많이 있다. 나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 게을러졌고, 매우 더 불친절해졌다. ‘그냥 나 같은 건 이제 안 먹히는구나, 쟤가 나한테 웃어줘도 저건 호감 아니고 자본주의 미소구나, 그리 생각하는 것이 디폴트’라고 마구잡이로 지껄였다.

나는 안다. 나는 내가 경멸해 마지않는 종자들로부터는 상처조차 쉬이 입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문득 놀라고 당황하고 아프던 순간들은 늘, 내게 다정하고 친절한 이들로부터 더 쉽게 던져졌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 사이는 언제나 생각 그 이상으로 복잡다단하다는 것을. 상식과 합리의 화신인 마냥 살고 싶어하는 나에게도 비-상식과 불-합리의 순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넘치고 넘친다는 것을. 인간 그렇게 나약한 존재여서 나는 늘 너그럽고 싶은데, 어째서 이렇게 참람한 세상에 나는 살고 있는 것일까.

뭐 크게 할 것도 없으면서 마음은 시간을 잰다. 성냥이든 라이터든 불만 끄면 뿅 나타나는 도깨비는 사실 일상과 인생에 치이며 근근 살아가는 인간 존재에 비하면야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이 아닌가! 멍청한 소리.

꾸준히 등장하는 미국발 통계 누군지 궁금하다. 검색 내역에도 딱히 없는데 오만사방 조선이며 연합이며 날씨정보쯤 걸치면 이게 젯팩의 한계일까 (깔지도 않았지만) 플러그인 문제일까. 04:25 슬슬 내가 무슨 말을 쓴 것인지 읽고 싶지 않아지는 것을 보니 좌우당간 좀 취하긴 한 모양이다.

1 thought on “2020. 7. 18. 03:56

  1. 천려 says:

    다시 보니까 마지막 문단 마치 ‘만주당을 살’ 보는 것만 같다… 두 번째 문장은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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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답시다 두비두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