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모든 밥상에 놓인 게 아니란다. 고정희.
아침이 찬란하게 빨랫줄에 걸려 있구나
한국산 범패 소리가 너도밤나무 숲을
멱감기는 골짜기쯤에서 우리는
너도밤나무 잎사귀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둥그런 밥상 앞에 둘러앉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 옆에
김치, 들깻잎, 오이무침이 아직 푸르다
멀고먼 바다에서 건져 올린 왕새우 요리가
붉은 빛을 띠며 접시 위에 엎드려 있다
아이야 너는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쌀밥보다 먼저 왕새우 요리에 손이 가고
밥 대신 햄버거, 숭늉 대신 코카콜라를 찾는구나
왕새우 요리가 밥상 위에 올려지기까지
주부들이 흘린 땀방울과
이 쌀밥 한 접시에 서려 있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곡절을 몰라도 되는구나
되도록 녹말은 조금만
단백질은 많이많이 섭취하는 아이야
네 웃음소리를 스스로 낮추련?
밥은 모든 밥상에 놓인 게 아니란다
네가 햄버거를 선택하고
왕새우 요리를 즐기기까지 이 흰
쌀밥은 애초부터 공평하지 않았구나
너는 이제 알아야 한다
밥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함게 나누는 것이란다
네가 밥을 함께 나눌 친구를 갖지 못했다면
누군가는 지금 밥그릇이 비어 있단다
네가 함께 웃을 친구를 아직 갖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지금 울고 있는 거란다
이 밥그릇 속에 이 밥 한 그릇 속에
이 세상 모든 슬픔의 비밀이 들어 있단다
그러므로 아이야
우리가 밥상 앞에 겸손히 고개 숙이는 것은
배부름보다 먼저 이 세상 절반의
밥그릇이 비어 있기 때문이란다
하늘은 어디서나 푸르구나 그러나
밥은 모든 밥상에 놓인 게 아니란다
네 웃음소리를 스스로 낮추련?
cf. 1992.11.11. 「정은임의 FM영화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