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은 유달시리 비가 많이 오는 듯 하다. 여름 내 가뭄이라고 농촌마다 논이 마르네, 밭이 갈라지네, 식수가 없네 했던 것이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바람이 차진 후에 오히려 비가 더 많이 내린다. 출근길이 사나와진 것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이제는 끽해야 한 달하고 닷새가 더 남았을 뿐이다. 입사하고 첫 날에 봤던 인사팀 모 과장을 만나 점심을 함께 했는데, 느닷없이 세월에 뺨따귀라도 맞은 기분이 이렇다 싶다.
도무지 저 옆옆 건물 7층에서는 그렇게도 가지 않는 것 같던 시간이 왜 이리 짧고 허망하게 지나갔단 말인가. 얼추 갖다붙여 보자면 지금 이맘때가 올 4월 초쯤이 될텐데, 그땐 벌써 (기간제) 답지 않게 열일하기 시작했던 무렵일 거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여기서는 정말 소소한 일만 하고 있어서 매일 매일이 비슷해 시간이 더 빨리 가는지도 모른다. 지금에 비하면야 그땐 정말 미친 소처럼 일했으니까.
지난 화요일에는 정총으로 가셨다는 P 삼과 여전히 712호에 파묻혀 계신 K 줌을 같이 만났는데, 의외의 소식도 들었다. 방송팀 K 아나가 ‘나를 우선으로! 나를 더 많이 쓰시오! 메이크업도 비싼 거! 의상협찬도 비싼 거!’ 하며 강짜를 놨다가 무려 잘릴(!) 위기에 처했다고 하던데, 역시 사람이 너무 큰 욕심을 부리다가는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내 밑의 의자가 빠지는 수가 있다. 까놓고 말하자면 본인이 무슨 K나 M, S본부 간판 아나도 아니지 않는가. 안타까운 일이다. (그 와중에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난 그런 얘기 못 해~”라고 하셨다는 그 분은 지금이라도 빨리 ‘리더십’의 역할에 대해 심도깊은 고민을 좀 시작해보셨으면 좋겠다.)
어제는 또 연가를 쓰고 뒹굴거리다가 종로부터 이대를 살짝만 훑고 왔는데, 학교에 잠깐 있다 나와보니 벌써 또 복학한 이후가 걱정이다. 조상님, 시조새, 할머니, 기타 등등 뭐 안 좋은 별명은 다 갖다 붙일 수 있겠지만 제일 싫은 게 4학년이라는 사실 그 자체다. 어딜가든 그렇지만 항시 신입생이고 막내일 때가 좋은 법이다. 먹고 살 방도도 시원치가 않고, 이제 과외자리도 씨가 말랐는지 쉽사리 구해지지가 않는다. 퇴직이 한 달이나 남은 시점에 왜 벌써 내달 더 뒤의 일을 걱정하나 싶기도 하지만, 천성이 이런 것은 별 수가 없다.
근래 감기로 고생한 덕에 술이 좀 줄었는데(정확히, 줄인 것이 아니라 줄은 것. 차이가 분명히 있다.) 해 바뀔 날이 머잖았으니 이제 또 술독에 빠질 날만 남았겠거니. 막상 그래봐야 선약은 아직 몇 없다. 그래도 연말이랍시고 보고싶은 얼굴들이 하나 둘씩 있기는 하다. 계절이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