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8. 위기

위기다, 위기이다. 저 발밑에서부터 차올라오는, 조금씩 나를 감아올라오는, 숨이 가빠지다 어느 순간 멎는 것 같은.

엊그제 수업에서 누가 또 슬럼프라는 얘기가 나와서, 스쳐지나가듯이 슬럼프인 사람들 다 모아다가 술판이라도 한번 벌여야 한다니까 하고 웃었다. JS. C도, XH. C도, H. S도, 그리고 나도. 나도 그래. 바로 그 전날 ㄹㄹㅍㅍ에 가서 맥주 한 잔씩을 시켜놓고 고사라도 지내는 양 새벽 차가 끊기도록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눴다. 버거움에 대하여. 막막함에 대하여. 결국 답은 없지만, 뾰족한 수는 없지만, 그 몇 시간만큼의 위로가 어디인가, 그렇게 여기면서. 남들도 다같이 힘들다는 사실은, 안도감은 줄 지 몰라도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둘은 달라. 이맘때쯤이 제일 힘들다고도 얘기들 하던데, 글쎄, 언제라도 더 쉬웠던 적이 있느냐마는. 아직 충분히 서로가 서로에게 동지가 되지는 않았다는 생각도 한다. 겉을 돈다. 아니, 사실 동지란 너무 거창한 이름이지. 그러기는 평생을 통틀어서도 쉽지 않다.

(시간 상으로는 어제가 되어버린 지난) 오늘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낮이 다 되어 깨서, 몰려오는 일들을 허겁지겁 처리하다 저녁이 되고, 약이 없으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꾸역꾸역 병원을 찾아갔다. 진료는 길지 않았고, 주사를 한 대 맞고, 약을 받았다. 약국에 가서야 약이 이틀치밖에 되지 않는 걸 알았다. 이틀 뒤에 다시 병원에 오는 것도 힘에 겨울 텐데.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 쌀국수집에 갔다. 쌀국수랑 나시고랭 볶음밥이 같이 나오는 메뉴를 시켜놓고. 또 한참 한참을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넣고. 그 와중에 연신 코를 풀어제끼다가. 밖으로 나서니 비가 왔다. 돌아오는 길엔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과제를 써야지 자리를 잡고 앉아서, 딴짓만 했다. 오자마자 약을 먹고, 유자차를 타서 마시다가, 식빵을 조금 꺼내 먹고. 다시 힘에 부치는 것 같아 침대에 누웠다 잠이 들었다. 한밤이 되어 깼다.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별로 어려운 내용도 아니다. 재미가 아주 없을 내용도 아니다. 그런데도 잡히질 않는다. 이번에도 리딩은 세 번째 논문까지 간신히 버티다가, 네 번째 논문 시작 부분에서 멈추었고. 쓰려고 보니 아무 것도 써지지 않는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다. 침잠할 시간을 갖고 싶다. 고요히 있을 시간을 갖고 싶다. 나의 시간을 갖고 싶다. 내가 읽고 싶은 글들을 읽고, 내가 쓰지 않고 버티지 못할 글을 쓰고 싶다. (그런 건 없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혹은 너무 오랜 방황이 필요하다.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헉헉거리고 있다. 전부 다 건질 수 있을 거라곤 이제 기대조차 안 하는데. 하나라도 건지고 싶다는 마음도 욕심은 아닐까 싶다. 나는 여전히 내 깊이가 너무 얕아 불만이고, 폭이 너무 좁아 불만이고, 방향이 명확치 못한 것이 불만이다.

밤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요즘 영화 때문에 다시 핫해진(?) 퀸의 영상을 찾아보았다. LIVE AID 영상을 틀어두었다. 그 다음은 보헤미안 랩소디 라이브 영상. 내 인생 최초의 보헤미안 랩소디 기억은 중학교 밴드부에서였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들이 있었으리라. 사람들이 우리 레코드 안 사면 그 노래에 스트립 아티스트가 되겠다던 짤방의 그이가 프레디 머큐리인 것도 며칠만에 깨달았다. 가사를 알아먹는, 심지어 내가 따라부를 수도 있는 노래를 틀어 놓으면 집중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노래가 나오는 카페에 따라가서 오만 짜증을 냈던 게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은 일이다. 알면서도 이수영 노래를 틀어놓고 있다. 한때 테이프가 늘어지게(는 사실 거짓말이고 그래도 전 앨범을 씹어먹게) 자주 들었던 앨범들을 줄줄이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해두었다.

문득 생각났는데. 이상하게 “(그 다음), OO이.” 하는 그 소리가 좋다는 생각을 했다. 어딘가 거리감을 좀 좁혀도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만들어서.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옛날 시험 때 프린스의 “갹갹아, 최선을 다해.” 하는 말이 기억난다. OO씨, OO양, 뭐 그런 것들보다는 확실히 거리감이 적다. 그렇지만 젠틀한 건 뒤편이지. 나는 내가 어떤 존재이길 기대하고 있는 걸까. 내가 속한 이 곳에서 내가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고랫적 옛날 얘기 나오면 술도 마시고 n시간 동안이고 세미나가 끝나지 않았다는 회상들이 등장하곤 한다. 그때라면 달랐을까. 나는 어떤 세계를 꿈꾸는가. 각설. 천재도, 영재도 되진 못할 거다. 아니, 둔재라도 재주라면 축복이고 감사할 일이 되지 않을까. 자고 일어나 약을 먹은지 한참인데, 여전히 콧물도 재채기도 멈추지 않고 점점 더 심해진다. 두어 시간 전쯤 교수에게 보낼 메일을 써놓고, 이걸 쓸 일이 없게 만들면 좋지 않겠나 하고 한글창을 켰었는데. 부질 없는 일이었다. 보내고 말고는 이미 떠난 것 같고. 몇 시쯤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을까, 뭐 그런 걸 고민해야 될 때인가보다.

오늘 상담에선 그 얘기를 하기로 했었다. 지난 주 이후로 내가 아직도 그 날짜들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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