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21. 한여름

여름이 되면 곧잘 한여름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그러면 정유미가 연기했던 그 한여름이 생각난다. 그 드라마가 그 즈음 방영했던 거였는지, 혹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반복해서 보았던 수많은 여러 번 중의 하나였는지는 이제 뚜렷하지도 않지만. 그때 나는 많이 힘들었다. 드라마를 틀어놓고, 드라마 때문인지 아닌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눈물을 자주도 흘렸었다. 많이 울었더랬었다. ‘내 마음 왜 이래’ 하면서 한없이 울던 그 캐릭터가 너무도 맘에 아렸었다. 에피톤의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같은 노래를 쉼없이 반복해 들었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또 너무도 이해되는 가사에 마음이 바스라지듯 아팠다. 그런데 또 그런 것 치고는 금방 다른 이를 찾았었지.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 게 뻔했으니. 그러고서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아주 지긋지긋한 후폭풍을 겪어가면서, 간신히 그 세계로부터 벗어났다. 그러니 나는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그때 받았던 상처들, 겪었던 가스라이팅, 눈치조차도 채지 못했던 수많은 후려치기. 단어가 참 경박해 보이지만, 이보다 더 적절할 수는 없겠지. 살아남은 나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 살아 남았고, 이겨냈고, 잘 살아내었으니. 알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는 데에는 실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굳이 기억 멀리에 묻어두어 꺼내지 않은 지 오래된 것들까지 헤집고 돌이켜 곱씹어야만 했고. 그렇게 곱씹은 결과가 이렇다는 데엔 뒤늦은 배신감이 몰려 오기도 하고. 자책으로부터 나를 멀리 떼어놓아야 한다는 생각도 함께. 이 생각을 굳이 하게된 건 무슨 대단한 계기는 아니었다. 그저 익선동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다가, 문득 튀어나왔지. 그때가 처음, 어제가 두 번째. 이제 세 번째는 없을 일.

어제 간만에 K를 만나 한참 옛날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나간 10년을 담아내기에 저녁은 너무도 짧았지만. 그래도 많은 연결고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라고 해주었다. 나 역시도 채워진 것보다 비워진 것들이 더 많았던 10년의 공백을 얼마간은 채운 것 같다. 정말 10년이더라. 어쩌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20년이 넘은 인연인데 10년이 이렇게 순식간에 흘러버렸었다니. 왜 함께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싶지만 또 어쩌면 함께하지 않았기에 각자가 훌륭하게 살아냈을 지도. 그 사이 나는 얼마나 어른이 되었을까. 원치 않는 고통들 속에서 나는 얼마나 단단해졌을까. 여전히 모를 일이다. 자라고 싶지 않은 마음과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욕심이 나를 여기저기 찢어 놓는다.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때면, 금방 눈물이 난다.

2 thoughts on “2018. 7. 21. 한여름

  1. 천려 says:

    이제야 갑자기 깨달았는데, ‘그’ 드라마는 한여름이 아니라 한여름 이전의 주열매가 나오는 드라마였다. 어젯밤 갑자기 한여름이 나온 드라마를 정주행을 시작했는데, 그러고 나서 지금 읽으니 그건 한여름이 아니라 주열매였네. 그러나 주열매에게 ‘내 마음 왜 이래’하던 그 순간이 있다면 한여름에게는 호수인지 연못인지 여하간 나무다리 위에 주저앉아야만 했던 그 순간이 있으니 결국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응답

댓글을 답시다 두비두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