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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해서 전시를 직접 보기 전까지 내 모든 관심은 ‘김현정’이라는 작가에게 쏠려 있었다.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아는 이름이 그뿐이었다. (물론 육심원 작가야 십여 년 전부터 문구류 매장에서 워낙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작품 스타일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었다.) 김현정 작가를 왜 처음 알게 됐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미 몇 년 전부터 SNS 상에서 꾸준히 그 작가의 소식들을 팔로우해왔다. 언젠가는 그 작가가 만드는 작품을 실제로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도 줄곧 해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공간에서 온전히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김현정보다는 김화현 쪽이었다. 내가 이 수업을 듣지 않았더라면 좀 달랐을까. 역시 그런 것도 아니다. 취향의 문제를 잠시 젖혀놓고 그럴싸하고 있어 보이는 핑계를 써내라면, 그 핑계는 이 수업이 내게 알려준 준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럴싸한 핑계’보다 앞서 내가 이 작가의 작품들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김화현이 그려내는 작품 속의 남성들이 보기에 좋았다(!)
김화현 작품 속의 남자들은 대개 ‘예쁜 남자’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거친 야성미 따위를 내뿜는 남성성의 화신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연약하고 다소곳해 보이는, 대강 보면 참한 여성을 모델로 삼은 것만 같은 (전통적 문법으로) ‘여성적’인 남성상인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김화현의 ‘Eve’들은 B급 문화, 어쩌면 그보다도 못한 C급 문화쯤으로 치부되기 십상인 어떤 ‘마이너’의 영역 속에서 끊임없이 생산되어왔다.
이와 같은 새로운 ‘남성’ 즉 전통적인 남성적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맥락의 남성 이미지는, 기실 내게는 그렇게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아주 어렸던 시절, 90년대에 등장했던 여성(혹은 여학생) 타깃의 아이돌들도 이미 ‘예쁜 남자’ 상에 굉장히 가까워져 있었다. 최근 들어서 더 많은 매니아층을 확보한 인터넷소설을 비롯한 온라인콘텐츠들에서도 역시 온전히 여성독자들을 위한 전형적 남성캐릭터들―김화현이 그려내는 남성 이미지와 굉장히 유사한―이 꾸준히 생성되고 있다.
김화현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순정만화에 등장할 법한 대중적 이미지를 과거 영웅이나 동양의 권위적 인물로 표현하여 생각의 반전을 보여”1줌으로써, 흔히 남성적 시각(권력)이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취급하는 차원에서 만들어낸 여성성의 이미지를 남성에게 덧씌워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미술의 익숙한 문법 내에서 일종의 전복적 효과를 만들어냈다.
그동안 여성들은 남성적 시각에 의해 평가되고 재단되는 것에 익숙해져있었고, 남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해석 자체도 감히 시도하려 하지 않아왔다. 미술의 역사에서 여성은 오랫동안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없었고, 심지어는 여성 자신에 대한 관찰과 인식조차도 오롯이 여성만의 것으로 누릴 수 없었다. 김화현은 이러한 미술사의 전통을 뛰어넘어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을 위한’ 미인상을 발굴해냈다.
한 가지 더 눈여겨보게 되는 지점은, 김화현의 작품만이 이 전시를 통틀어 유일하게 남성을 대상으로 삼은 작품들이었다는 것이다. ‘미인도’라는 것이 애당초 아름다운 여인들을 그려낸 인물화를 뜻하는 것일진대, 이런 미인도를 다루는 전시에 남성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 포함됐다는 것만으로 김화현은 이미 ‘미인’의 범위를 한층 더 확대시키는 역할을 해준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김화현의 작업은 가장 한국적인 기법으로, 가장 독창적인 내용을 담아 여성과 남성 사이의 통상적인 권력관계를 뒤집은 결과물에 해당한다. 그 과정에서 여성작가 김화현은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자리하게 되고, 언제나 대상이 아닌 주체로만 여겨졌던 남성은 드디어 대상으로 해석당하기 시작한다. 즉 김화현의 작품들은 모두 ‘여성작가’가 그려낸 ‘남성미인’으로서 중첩적 의미를 갖게 된다.
나아가 <Eve>를 비롯한 김화현의 다른 작품들이 한 명의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도원결의桃園結義>의 경우는 특별히 세 명의 남성이 등장한다. 제목만 놓고 보자면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를 모티프로 삼은 듯 보이지만, 그림 속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의형제 관계보다는 차라리 삼각의 브로맨스 관계처럼 느껴진다. 섹시함을 어필하는 미디어의 뭇 여성들처럼 맨다리를 자연스레 내보이고 가슴께를 풀어헤친 남자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눈빛이나, 자연스레 허리 밑을 향해있는 유비의 손은 모두 대표적인 남성동성애 코드(흔히 ‘BL, 즉 Boys Love’라고 불리는) 의 암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김화현은 많은 남성 화가들이 남성의 성적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대체재로 활용해왔던 ‘여성동성애’ 회화의 문법에 남성들을 대입시킴으로써, 여성과 여성의 욕망을 시선의 권력 주체로 재차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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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현에 이어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또 한 명의 작가는 임서령이었다. <웃는 여잔 다 예뻐>라는, 어딘가 조금 투박해 보이는, 그러면서도 잔잔하게 다가오는 연작의 작품들은 우리 할머니와 함께 동네 노인정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계실 것만 같은, 여러 할머니들을 담은 것이다. 이 작품을 본 첫 순간에 그 자리에서 떠오른 노래 하나가 있었다. 양희은의 음악 중 <넌 아직 예뻐>라는 곡으로, 가사는 다음과 같다.
“그랬니? 음~ 그랬어? 음~ 알아, 알아. 음~ 알겠어”
“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그냥, 그만 살고 싶어요”
“그만 살기는? 우리 둘이 이제부터 재미있게 살아야지,
여기 사진관도 있겠다,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자구, 얼른 단장도 하고. 응? 응?”
“그럴까요?”
깊은 밭고랑 같은 주름살 위에 하얀 눈 같은 분칠을 하네 “어때요?”, “아유~ 곱네!”
찬바람에 트고 거친 두 뺨에 복숭아빛 분칠을 하네
성성한 갈대 같은 눈썹 위에 초승달 같은 눈썹 올리네 “인물 난다!”
타다 남은 재 같은 입술 위에 빨간 앵두빛 연지를 바르네
자, 눈을 감아봐 넌 아직 예뻐~
자, 눈을 크게 떠 넌 아직 예뻐
거칠은 손, 자글자글한 주름살, 거뭇거뭇한 검버섯,
속이 훤히 보이는 흰 머리칼, 팍팍 쑤시는 무르팍 “허~”
“그뿐인가요?”
구부정한 등, 축 쳐진 엉덩이, 늘어진 가슴, 출렁출렁 뱃살
아~ 좋은 시절 다 갔네 하지만 넌 예뻐
밥 잘하는 네 손이, 푸근한 눈빛이
예쁘다, 예쁘다, 예쁘다, 참 예쁘다
자, 눈을 감아봐 넌 아직 예뻐~ 자, 눈을 크게 떠 넌 아직 예뻐
자, 눈을 감아봐 넌 너무 예뻐~ 자, 눈을 크게 떠 넌 너무 예뻐
넌 너무 예뻐, 넌 너무 예뻐
양희은이 “거칠은 손, 자글자글한 주름살, 거뭇거뭇한 검버섯”을 가진, “구부정한 등, 축 쳐진 엉덩이, 늘어진 가슴, 출렁출렁한 뱃살”의 노년의 여성과 마주해, 아름답게 단장을 해주며 그녀의 “예쁨”에 대해서 노래했다면, 임서령은 할머니들의 웃음 가득한 표정을 색색의 꽃과 오버랩하여 그려냄으로써 ‘늙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예찬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미인상을 발견하게 된다.
고금을 막론하고 동서양의 ‘미인’이 항상 젊은 (혹은 어린) 여성으로 대표되었던 것과는 달리, 임서령의 미인은 나이가 많은 여성들이다. 이들의 아름다움은 어려보이는 얼굴이나 탱탱한 피부결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다만 웃음으로 아름답다. 누구는 무궁화꽃, 누구는 능소화, 누구는 달개비의 웃음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는 각자가 살아온 삶이 있고, 그 삶을 대해온 그녀들의 태도가 함께 녹아있다.
그래서 임서령이 그려낸 ‘할머니미인’은 보통의 ‘미인도’와 전혀 다른 맥락을 갖는다. 한국 전통의 미인도는 기록이 아닌 소비를 목적으로 한 상품에 가깝다. 따라서 미인도의 주인공은 여인이되 그저 ‘여인’이기만 하고, 이름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익명이어야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2 그러나 임서령이 작품으로 담아낸 할머니들의 이미지는 남성에 의한 것도 아니고, 남성에게 소비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남성일반이 제시하는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삼는 대신, 여성으로 살아가는 작가가 또 다른 여성들, 그 중에서도 삶의 연륜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낸 할머니-여성들과 조우하여 그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畵畵 미인도취』전시는 여성을 회화적 언어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확립시키면서 동시에 ‘미인’의 폭을 확장시키고, 그 영역의 뚜렷했던 경계를 부분이나마 허물어 없애버리는 데에 성공한 듯 보인다. 그리하여 ‘남성미인’과 ‘할머니미인’은 마침내 발견되었다.
/ 2016. 1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