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에게 바쳐진 영화, 집으로(2002)

영화의 내용보다는, 영화의 끝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감독은 영상의 끝에 한 줄의 글을 더하며 영화를 마무리했다.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께 이 영화를 바칩니다.’ 그 감동의 여운 끝에 작은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왜 ‘외할머니’일까. ‘친할머니’에겐 아니고, 오롯이 ‘외할머니’에게만 바쳐진 영화 <집으로>. 떠오른 질문에 나는 이내 쉽사리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당장 나의 어린 시절만을 떠올려 봐도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달랐다.

대개는 ‘할머니’라는 말은 친할머니를, 그리고 ‘외할머니’만이 외할머니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한다고 하지만, 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나이가 들어 자취를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고,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그래서 내게 할머니는 1년에 많아야 열 번도 보지 않는 ‘친할머니’가 아니라, 매일 같이 내 밥상을 차려주시고 내 옷을 빨아주시던 ‘외할머니’였다.

내가 하루하루 나이를 먹고 성인에 가까워지는 동안 할머니 역시 내 어릴 적처럼 그대로 계셨을 리는 없었다. 내가 조금씩 커갈수록, 점점 나이가 들고 노쇠하여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숱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외할머니가 파킨슨 진단을 받은 지도 벌써 10년 째, 가끔은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면 나는 어떨까, 하는 바보 같은 질문도 던져보곤 했다. 그러다 가닿은 생각 끝에는 어쩌면 누군가에겐 ‘몹쓸’ 것일지도 모르는 단상이 있었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슬플 것이다. 상실감도 클 것이다. 나를 존재할 수 있게 해준 분이고, 태어나 지금까지 항상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던 분이니까. 어쩌면 며칠 정도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픔에 빠져있을 지도 모른다. 수업도 들을 수 없을 것이고 어떤 일이든 손에 쉬이 잡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돌아가신다면, 그때는 내 세상의 일부가 온전히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간의 상실감과 슬픔의 수준으로 그치지 못할 것이다. 살면서 언제라도 문득문득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처럼 슬퍼할 지도 모른다. 나라는 사람이 지금까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누구보다도 외할머니의 헌신과 희생이 컸으므로. 외할머니는 곧 나를 나일 수 있게 만들어주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정향 감독이 의도한 것도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어쩌면 우리 모두는 외할머니로부터 자라는 것이 아닐까. 강원도 두메산골 깊숙한 곳에서 홀어머니의 손에 자라, 19살에 홀로 도시로 나섰고, 가정을 꾸려 상우를 낳았다가 남편과는 이혼한 상우의 어머니. 그리고 부모의 이혼 후에 어머니의 손에 전적으로 맡겨진 상우. 상우의 어머니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상우를 맡길 수 있는 곳 역시 어머니의 어머니, 할머니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 어머니가 되고, 또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 노릇을 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면 <집으로>는 어떤 의미에서 다분히 ‘전형적인’ 영화이다. (영화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바쁘고 삭막한 도시와 정이 넘치는 조용한 시골 풍광의 대비, 영악하고 얄미운 도시 아이 상우와 순박한 산골마을 아이들, 미운 7살 소년과 허리가 다 굽은 할머니, 모든 것이 전형적인 대비를 이룬다. 전자의 것들이 후자의 것들에 서서히 포섭 혹은 동화당하면서, 점차 순수한 것, 더 선한 것, 바람직한 것으로 대체되어가는 장면들에서 관객들은 감동을 얻는다.

개봉 즈음에 영화를 봤을 때는 잘 알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로 영화를 다시 보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 이 영화가 강원도 산골의 모습을 담아내는 방식은 비단 시골 풍광의 나열뿐만이 아니어서, 오히려 나는 영화에 담긴 소리들에서 더 진한 고향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다. 깊은 밤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소리, 비가 그친 뒤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들이 마당에 고이는 소리, 시골 버스를 가득 메운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구수한 대화, 시끄러운 닭 울음소리,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엮이며 ‘시골다움’을 연출해주었다.

극의 진행을 따라가는 동안에 할머니는 마치 언제고 변하지 않는 존재처럼 그려진다. 굽이굽이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만 하는 좁은 산골마을, 다른 집들과도 멀리 떨어진 그곳 어딘가에서 항상 있어서, 언제든 보고 싶을 때 다시 돌아오면 늘 우리를 반가이 맞아줄 것만 같은, 그런 할머니. 그래서 사실 상우는 도시의 ‘집’을 떠나 ‘할머니 집’에 잠시 머무르고 다시 또 ‘집’으로 돌아가는 것임에도, 영화의 제목은 <집으로>이고, 이 제목의 ‘집’은 결코 도시의 집이 아닌 것이다.

/2016.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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