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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모든 상황에 외할머니를 ‘외할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신 친할머니를 ‘친할머니’라고 부른다. 내게 있어 ‘할머니’는 곧 ‘외할머니’시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이를 먹고 집에서 나와 자취를 하기 전까지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고,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그래서 내게 있어 ‘할머니’는, 많아야 1년에 열 번도 채 보지 않는 ‘친할머니’가 아니라, 매일같이 내 밥상을 차려주시고 내 옷을 빨아주시던 외할머니였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도 ‘할머니’는 나의 외할머니이다.
할머니는 1931년 서울 이태원에서 태어나셨다. 2남 3녀 중에 3녀로, 다섯 아이 중에는 넷째였다. 원래는 할머니 앞으로 아이 하나가 더 있었지만 아주 어려서 죽었다. 일제하에서 이태원소학교를 졸업하셨고, 중학교는 가지 못하셨다. 소학교 6학년 때 학교 대표로 뽑혀 동대문운동장에서 달리기 시합에 나가셨던 걸 지금까지도 어릴 적 가장 자랑스러운, 그리고 벅찼던 시절로 기억하신다. 아직까지도 일본어로 구구단을 술술 외신다.
이태원에 살던 시절, 할머니의 어머니(내게는 외증조할머니)는 광목을 떼와 깨끗이 빤 뒤에 소월길 남대문시장에 내다 파는 장사를 하셨고, 아버지(외증조할아버지)는 우체국엘 다니셨다고 한다. 할머니의 큰오빠는 철도청에서 일을 하셨고, 할머니의 남동생은 젊어서부터 일흔이 넘으셨을 때까지, 즉 비교적 최근까지 이태원 근처의 미군부대에서 일을 하셨다. 나의 할머니도 영등포에 있는 방직회사에서 이태를 일을 하다 전쟁을 맞았다.
전쟁이 났을 때, 영등포에 있다가 한강 다리가 끊어져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 길로 함께 있던 사촌과 바로 피난을 갔다. 기차 머리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사람들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기차에 매달려 천안까지 갔다. 까딱 잘못해 손을 놓치기라도 했으면 그대로 죽었을 길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리곤 다시 버스를 타고 진천까지 가닿았다. 진천에 할머니의 작은아버지들이 살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보통 ‘작은집’이라고 불렀던 그 곳은 진천 덕산면의 상수리 하방골에 자리했다.
전쟁이 좀 가라앉았던 다음 해에는 서울로 다시 돌아와 한동네에 살던 남자를 소개받고 결혼을 했다. 전쟁으로 흩어졌던 가족 몇이 다시 만나 흑석동에서 지낼 때였다. 식도 영등포에서 올렸는데, 시댁이 하숙을 치던 집이라 방이 모자란다고 결혼 첫날 밤부터 맏동서와 셋이 한 방을 썼다. 결혼 시늉도 안 나는 결혼생활에, 남자는 두 달 만에 군대에 갔다. 그리고는 그 뒤로 한 번을 못 만난 채로 군에서 전사했다.
남편은 이미 가고 없는데, 하숙을 친다는 시댁에서는 할머니를 거진 종처럼 부려먹었다.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겠다 생각한 할머니는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이태원의 집 한 채를 팔아 8천 원을 들고 혼자서 진천으로 내려갔다. 진천에서 쌀을 놓고 가을이면 서울 신당동에 갖다 팔았다. 한 섬에 90kg씩 나가던 쌀을 여자 혼자 이고지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 여기저기서 품도 많이 팔았다.
그렇게 진천 작은집 방 한 칸에 자리를 잡고 서울을 오가며 쌀장사를 하고 살던 1959년, 남자 한 명을 소개 받았다. 남자는 자신이 문경 사람인데, 지나간 물난리에 처자식을 모두 잃었다고 했다. 보따리 장사를 하던 남자와는 “달 보고 왔다 달 보고 가는” 그런 사이였다. 그 사이에 아이가 생겼고 1960년 10월에 혼자서 딸을 낳았다.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건너 건너 전해 듣고는 남자가 포대기와 미역을 사들고 찾아왔다. 남자가 난리통에 잃었다던 처자식은 문경 옆 예천에서 잘만 살고 있었단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남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남자가 최가였던 터라, 딸의 이름은 초등학교 때까지도 최OO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에야 호적을 정리해 할머니의 큰오빠 호적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최OO은 이OO이 됐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쯤, 엄마는 친아버지를 찾으려 했었다. 수소문 끝에 아버지를 찾았지만 이미 돌아가신 뒤였고, 그 집 자식들은 엄마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1963년에는 같은 방골에서 남의 집 일을 봐주던, 그러니까 새경 받고 머슴을 살던 용인 출신의 한 ‘총각’과 동거를 하게 됐다. (할머니는 그가 총각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64년에 아들을 낳았다. 착하고 자상한 남자였지만, 술과 노름이 문제였다. 추운 겨울 땔감이 없어도 살림을 돌보지 않는 남자를 두고 할머니는 ‘이렇게는 결혼을 할 수 없다’고 했다. 할머니를 두고 용인으로 돌아간 남자에게 그 댁 부모가 ‘가서 네 아들 데려오라’며 호통을 쳤다. 그렇게 아들(내게는 외삼촌)를 데려다가 그 집 장손을 삼았다.
지금도 우리 엄마와 외삼촌은 호적이 서로 다른데, 외할머니의 큰오빠 호적 아래 있던 엄마나 용인집 호적의 맏아들이었던 외삼촌이나 성이 같은 이 씨였던 터라, 이번 과제를 계기로 얘기를 듣기 전까지 나는 전혀 사실을 몰랐었다. 용인에서는 갓난쟁이 애를 데려가 놓고 몇 달 만에 못 기르겠다고 다시 데려가라 했다. 그러고는 그도 따로 결혼을 했고, 자식도 둘이나 생겼다. 그럼에도 한동안은 연이 완전히 끊어지진 않아서, 금전적인 도움은 못 받았어도 가끔씩은 할머니가 애 둘을 데리고 용인 집에 가기도 했었다. 엄마도 그 때를 기억한다고 했다.
키가 150cm도 되지 않는 작은 체구에, 식은 올렸으되 아무 일이라곤 해보지도 못한 채 끝나버린 결혼 끝에 남겨진 ‘미망인’이라는 딱지 앞에서 할머니는 항상 스스로를 낮추고 또 낮추었다. 그래도 품에 남은 아이들은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악으로 독으로 품 팔고 쌀 팔아 자식 공부를 시켰다. 일꾼을 더 구해서가면 하루치 삯을 더 준다고 해서, 딸도 데리고 나가 같이 품을 팔기도 했다. 막노동도 하고, 산에서 나무도 하고, 품도 팔고, 쌀장사도 하고. 안 하는 일 없이 꾸역꾸역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할머니가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는 모습을 보며 동네 사람 누군가는 중신애비를 붙여주며 ‘아이들은 고아원에 맡기고 재혼을 하라’고 등을 떠 밀기도 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내 자식을 내가 책임 안지면 누가 지겠냐며 아이들 곁을 지켰다.
1971년에는 한 동네 살던 친척이 텃도지로 1년에 쌀 서 말 값을 약속하고 내준 땅에 집도 지었다. 등기를 해야 하는 걸 몰랐던 터라, 땅은 남의 땅이요 집에는 문서가 없으니, 땅을 내준 친척이 돌아가신 뒤에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다. 집을 짓고 처음에는 구멍가게 비슷한 걸 차려놓고 장사를 했다. 옆 마을 양조장에서 막걸리도 떼다 팔았다. 장사 시작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차에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동네에서 운영하는 슈퍼에 밀려 문을 닫아야만 했다. 결국 자식들 다 키워 딸 시집 보내고 아들 장가 보낼 때까지도 계속해서 품팔이로 생계를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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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1960년 진천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없었다. 그래도 철이 없을 땐 신경도 안 쓰였다. 집안 사정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도, 어딘가 특이하다는 것도 잘 몰랐다.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그럭저럭 재미있게 잘 지냈다. 그래도 어떤 순간, 그러니까 나보다 공부도 못 하고 점수도 낮은 친구가, 학교 담임선생님이 그 집 아비로부터 술 한 잔 받은 뒤론, 나보다 더 높은 성적을 받는 걸 볼 때는 악에 받쳤다. 그럴 때면 집에 돌아와 할머니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월사금 늦었다고 학교서 쫓겨나기도 여러 번이었다. 공부는 곧잘 했지만 할머니가 해줄 수 있는 건 중학교까지가 끝이었다.
그래서 남들 고등학교 다닐 때 혼자 서울로 올라왔다. 이태원의 이모네를 거점 삼아 서울과 진천을 오가며 일을 했다. 오촌 아재의 소개로 일할 곳을 찾아 갈월동 주유소에도 가보고, 중랑교 지나 한독약품에도 지원해봤다. 또 다른 아재가 소개해 준 영등포 공장에서는 물갈이에 두드러기가 심해 일한 지 보름만에 뛰쳐 나왔다. 한번은 이태원 남의 집에 꼬매식모로 들어갔다가 그 집 어린 것 등쌀에 시달리다 자존심이 상해 며칠만에 그만둔 적도 있다. 다른 한 번은 아는 교회 전도사님이 자기 여동생이 임신했다고 가서 좀 도와주라는 말에 화곡동 집에를 들어갔었는데, 몇 달만에 그 부부가 이혼을 해 돌아 나온 적도 있었다. 그렇게 일하고 다닐 때 만났던 입이 걸걸한 한 아줌마가 “너는 중매해서는 시집을 못 가겠다. 애비도 없고.” 하는 말에 그대로 꽂혀서 ‘내가 꼭 성공 하겠다’고 다짐했다.
서울에서는 직장을 찾아다니고, 진천에 내려갔을 땐 할머니와 같이 품을 팔았다. 고추도 따고, 담배도 따다 엮고, 과수원 가면 과일 따고, 벼 타작도 하고, 마늘 캐러 초평도 다니고, 누에치는 집에 가서 몇 주간 살기도 하고, 논에 모 심는 것만 빼곤 다 했다고 했다. 그러다 또 서울에 올라오면 이력서 들고 일 할 곳을 찾아 다녔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해야겠다 싶어 1979년에 창덕여고 부설 방송고 과정에 들어갔다. 그리고 고교 3학년 때 한 친구의 추천으로 국제약품에 입사하게 됐다. 그렇게 학교도 다니면서 일도 했다. 엄마는 이 ‘국제약품’을 당신 인생의 전환점으로 꼽는다.
1981년 처음 입사 때만 해도 이태원 이모네에서 광장동까지 출퇴근을 했다가, 곧 얼마 되지 않아 광장동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워커힐 밑 동네에서 보증금 10만원에 월세 2만 원짜리 방으로 시작했다. 7년 7개월을 일하는 동안 여섯 번 이사를 했고, 일을 그만 둘 때는 보증금 450만 원짜리 전세방에 살고 있었다. 정말 악착같이 아끼고 모은 결과였다. 한 번은 중간에 전세금을 떼먹힐 뻔 했던 적도 있다. 같이 일하던 국제약품의 ‘남자’ 상사의 도움을 받아, 이사 나가는 차를 세워 막고서야 간신히 그 피 같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국제약품을 다니는 동안 신학대학에 가게 됐고, 그 신학대학에서 아빠를 만났다. 결혼도 했다.
광장동 살면서 광장교회란 데를 다녔는데, 거기에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생들이 많았다. 청년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아동부랑 중고등부 교사도 열심히 했다. 매일같이 교회에서 철야를 하고, 아침이면 집에 가 그저 씻기만 하고 아침밥도 거른 채로 출근을 했다. 배가 고프니 점심 때가 되면 회사서 주는 밥을 산처럼 쌓아놓고 먹고, 퇴근하고는 또 다시 교회로 달려갔다. 교회의 멋있고 괜찮은 선배들은 다 신학대학엘 다니는 걸 보고 신학이 하고 싶었다. 공부도 하고 싶은데 공장엔 계속 다녀야하니 야간과정이 있는 학교만 갈 수 있었다. 장신대엔 야간이 없어서 대신 서울장신을 선택했다. 1983년 2년제 과정에 입학해, 2년을 끝내고 1년간 또 다시 돈을 벌었다. 86년에 다시 4년제 과정에 편입해 공부를 마쳤다.
새삼 다행이었던 일은, 다니던 국제약품의 사장이 교회의 장로였는데 신우회 활동을 열심히 하던 엄마를 아주 좋게 봐주었다. 신학을 공부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남들 6시 퇴근일 때에 5시에 먼저 가도 괜찮다고 배려를 해주기도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남대문 본사에서부터 승용차가 와 엄마를 실어가는 모습을 보고 동료들 사이에 뒷말도 있었다고 한다. 구구절절한 사연이야 어떻든 여러 사람의 배려와 도움으로 일을 하면서 원하던 공부를 마쳤다. 엄마에게 그때 샀던 책들은 죄 하나같이 밥도 못 먹고 연료비까지 아껴가며 산 것들이라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아빠는 지금도 종종 그 책들을 두고 “당신 묘 쓸 때 이 책 다 같이 넣어줄게!”하고 놀리곤 한다.
그래도 지금은 담담하게, 또 때로는 웃으면서 돌이킬 수 있는 과거가 됐지만, 당시에 엄마는 자주 아팠다고 했다. 툭 하면 쓰러지고, 빈혈이 찾아오고, 심하면 정신을 잃고. 무릎이 너무 아파서 다리를 절고 다녔는데, 병원에 가도 아무런 결과가 안 나왔다. 한양대병원 정신과에 가서야 ‘신체화 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중학교 졸업 이후 10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은 그 자체만로 멈출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렇게 계속되었지만, 그 속에서 이미 스트레스는 극으로 치달아 있었다.
극한의 코 앞에 가닿아 항상 위태롭기만 했던 내면의 아픔과 고통들은, 결혼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잠잠해질 수 있었다. 1986년 여름 학교의 어떤 행사에서 아빠를 처음 만나 연애를 했다. 졸업 후엔 아빠는 교육전도사로 일하고 있었고, 엄마는 국제약품을 계속 다니고 있었다. 1988년 6월에 식을 올리고, 11월에 아빠의 첫 임지가 남양주 별내면의 광전교회로 정해졌다. 부임하고부터 계속해서 ‘전도사 사모가 무슨 직장이냐’는 눈총을 받은 때문에, 89년 1월에 근 8년의 근무를 끝으로 국제약품에서 퇴사했다. 그래도 ‘사모가 사모 역할만 다 하면 된다’고 여기며 첫째(언니)도 낳고 둘째(나)도 낳아 그만그만하게 잘 지냈다. 그리고 1994년 셋째를 임신했을 때 아빠가 수원의 한 교회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에, 일이 터졌다. 애초에 셋째의 임신부터 예상 밖이었다. 나를 낳은 뒤로 아빠는 엄마에게 정관수술을 했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아들이 아쉬웠던 아빠가 수술을 계속해서 미루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얻은 셋째가 엄마 뱃속에 있는 사이에 아빠가 외도를 했다. 죽으려고 했지만 죽을 수가 없었다. 전후의 그 끔찍한 시기에도 아비 없이, 남편 없이, 심지어 아버지도 서로 다른 아이 둘을 악착같이 길러낸, 그런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엄마였다. 눈에 밟히는 생떼같은 아이들을 두고 죽느니, 이 애 셋을 오롯이 내 손으로 건사 하겠다 생각하며 독하게 홀로서기를 준비했다.
그래서 1996년 아빠가 강원도 태백의 철암으로 부임했을 때, 엄마는 대교 눈높이의 선생님이 되었다. 2월에 처음 교육을 받고 97년 서울에 올 때까지 기를 쓰고 버는 돈을 모두 모았다. 돈을 충분히 다 모으면 자식 셋을 데리고 이민을 가는 게 엄마 삶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 때 엄마가 일을 시작하면서 우리를 보살피기 위해 할머니가 올라오셨다. 양육의 많은 부분이 할머니의 몫이 됐다.
그러다 그해 겨울에 아빠가 몰던 교회차량이 사고가 났다. 아빠는 물론이고 교인들도 여럿이 다쳤다. 교회에서는 아빠를 당장 나가라고 했고, 아빠는 목발을 짚은 채 서울로 올라와 동대문구의 한 교회에서 사찰이 됐다. 멀쩡히 목회를 하던 전도사가 느닷없이 다리까지 불편한 사찰이 됐다. 그나마도 할아버지와 연이 있는 목사님의 배려로 가능한 일이었지만, 아빠가 재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자 다시 또 쫓겨났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사찰 마누라가 교회밥도 못 한다’며 권사, 집사들에게 욕을 먹었다.
1997년 교회에서 쫓겨나던 그 달에 엄마는 살기 위해 다시 눈높이 근무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20년 째 이어져 지금까지도 엄마는 눈높이에서 일을 하고 있다. 여하간 사찰 자리에서 쫓겨났으니, 사택에서도 쫓겨나는 게 당연했다. 철암에서 엄마가 눈높이를 하며 벌어둔 돈과 여기저기서 빌린 돈을 갖고 전세 3천 지하방에 이사를 했다. 그리고 99년에 할머니가 주신 돈과 엄마가 모은 돈을 합치고, 은행 대출까지 받아 1억 3천에 아파트를 샀다. 엄마 생에 최초의 내 집 마련이었다. 그 뒤로 몇 년을 더 죽을 듯이 돈을 아껴 빌렸던 돈을 다 갚았다. 엄마는 할머니에게서 받았던 돈도 이자까지 쳐서 갚았다. 외식은커녕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지 않고, 아끼고 졸라매서, 눈물겹도록 고생한 끝에 엄마가 해냈다. 그때 이미 우리 집의 실질적인 가장은 엄마가 돼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항상 할머니가 있었다.
살림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뒤, 엄마는 못 다 이룬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했다. 엄마가 졸업한 서울장신은 학력인정이 되지 않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1986년에도 이미 한번 방송대 영문과에 입학해 제대로 된 학사학위를 받으려 했었다. 그럼에도 결국엔 여러 상황이 좋지 않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일을, 15년 가까이가 다 지나서 다시금 또 도전했고, 딱 입학 4년만인 2004년에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그 다음에는 곧바로 숙대의 평생교육원에서 아동미술심리치료사 자격증 과정을 이수했다. 미술치료를 공부하는 사이에 엄마 스스로도 마음 깊은 곳에 응어리져 남아있던 여러 문제들이 치유되는 경험을 겪기도 했다.
이후로도 엄마는 계속해서 우리 집안의 가장 역할을 전담하고 있다. 생활력이 거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엄마 혼자 번 돈으로, 그리고 그런 엄마를 위해 손주들을 도맡은 할머니의 손길로, 나와 내 언니와 내 동생이 지금까지 자랐다. 예의라곤 모르는 철 없는 꼬맹이들이 ‘선생님 손은 왜 이렇게 할머니 손 같아요?’하는 소리를 하는 꼴을 겪으면서도 엄마는 여전히 일을 멈추지 않는다/못 한다. 셋이나 되는 자식들이 모두 성인이 됐는데도 여전히 가계 경제를 책임지느라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를 보고 있자면, 졸업도 안 한 나의 존재 자체가 죄송해질 때도 있다.
3
생각해 보면, 나의 할머니는 그야말로 ‘살아남는 것’ 하나를 위해서 살아오셨던 것 같다. 할머니에겐 한평생 의지할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도 없었다. 그저 살아지는 대로, 어떻게든 살기 위해, ‘살았다’. 어떻게 하다 보니 결혼을 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남편을 잃었고, 살고자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어쩌다보니 아이가 생겼고, 아이는 생겼는데 아빠는 없었고, 다른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려 했지만, 또 다시 남은 건 아빠 없는 둘째였다. 전쟁, 가난, 끝나지 않는 노동의 쳇바퀴 속에서 할머니는 스스로를 한없이 비관했다. 그래서였을까, 할머니는 당신께 붙여진 ‘OO’이라는 이름도 항상 부끄러워만 하셨다.
할머니는 지금 10년 가까이 파킨슨병을 앓고 계신다. 안 그래도 작고 작았던 체구가 그 사이 더 보기 힘들만큼 작아지셨다. 몸무게가 반으로 줄고, 살가죽 안으로 뼈마디가 잡힌다. 최근에는 상태가 더욱 악화돼 응급실행도 잦아졌다. 딸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 하러 밖엘 나가고, 사위는 애초부터 저 먼 지방에 살고, 손녀 둘 역시 다른 집에 나가 살고, 막내 손자는 군대에 가있다. 일상의 시간, 아무도 함께 있지 않는 빈 집을 낮밤으로 지키면서 할머니는 조금씩 말라가고 계신다. 그런 할머니에게 있어서 삶이란, 희망과 행복보다는 오히려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한 거대한 시험장이 아니었을까.
엄마는 ‘살아남았고’, 더 나아가 ‘꿈을 꾸기도’ 했다. 엄마가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은 나도 기억할 만한 나이 때의 일이여서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없는 휴가를 탈탈 털어 대학로에 가 앉아 수업을 듣는 엄마를 아빠와 함께 밖에서 기다리면서. 컴퓨터를 쓸 줄 모른다고 열 살 조금 넘은 나를 앉혀놓고 논문작성법 책을 들이민 엄마랑 같이 과제물을 쓰면서. 얼결에 따라갔던 숙대 강의실에서 엄마 옆에 앉아 패션잡지를 오려주면서. 엄마는 엄청 바빴고, 그래서 항상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때 가장 행복해했다.
근래에 나는, 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던 수준의 우울함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돈은 항상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많아 모자라기만 하고. 모기 목숨 같은 과외생활에 지칠 만큼 지쳐있기도 했었다. 졸업 이후가 막막하고, 하고 싶은 공부도 뜻대로 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불안해했다. 자주, 일상을 살다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좌절감과 무력감에 이내 미치기라도 할 것처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마도 거의 처음으로 카페에 엄마와 단둘이 마주 앉아 얘기를 들으면서, 엄마의 말을 받아 적는 내 손보다 마음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겨울나무처럼 앙상하게 마른 할머니 손을 붙잡고 새카맣게 어두운 방에서 얘기를 들으면서는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와 할머니의 인생사를 한 줄도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항상 빠듯하고 아껴야 하는 생활 속에서 자랐어도, 당장의 끼니 때에 밥 굶기를 걱정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남들 다니는 학교를 못 다니지도 않았고, 오히려 남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들까지도 제공받았다.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온 뒤로는 생활비를 번다고 알바를 두 세 개씩 하기도 하고, 과외도 근로도 인턴도 정말 숱하게 해보았지만. 그럼에도 나의 엄마가, 그리고 나의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절박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니 결국, 너무도 당연하게 ‘이상’을 말하고, 이런 일을 할까 저런 공부를 할까 고민할 수 있는 나의 오늘은, 모두 내 할머니와 엄마에게 빚진 것들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 2016. 11. 14. 쓰고, 2017. 1. 14.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