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수도가 서울인 점이 우리나라의 관습헌법인지 여부
(1) 성문헌법체제에서의 관습헌법의 의의와 성립요건
(가) 우리나라는 성문헌법을 가진 나라로서 기본적으로 우리 헌법전(憲法典)이 헌법의 법원(法源)이 된다. 그러나 성문헌법이라고 하여도 그 속에 모든 헌법사항을 빠짐없이 완전히 규율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한 헌법은 국가의 기본법으로서 간결성과 함축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형식적 헌법전에는 기재되지 아니한 사항이라도 이를 불문헌법(不文憲法) 내지 관습헌법으로 인정할 소지가 있다. 특히 헌법제정 당시 자명(自明)하거나 전제(前提)된 사항 및 보편적 헌법원리와 같은 것은 반드시 명문의 규정을 두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헌법사항에 관하여 형성되는 관행 내지 관례가 전부 관습헌법이 되는 것은 아니고 강제력이 있는 헌법규범으로서 인정되려면 엄격한 요건들이 충족되어야만 하며, 이러한 요건이 충족된 관습만이 관습헌법으로서 성문의 헌법과 동일한 법적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나)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다. 이와 같이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권자이며, 국민은 최고의 헌법제정권력이기 때문에 성문헌법의 제ㆍ개정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헌법전에 포함되지 아니한 헌법사항을 필요에 따라 관습의 형태로 직접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습헌법도 성문헌법과 마찬가지로 주권자인 국민의 헌법적 결단의 의사의 표현이며 성문헌법과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관습에 의한 헌법적 규범의 생성은 국민주권이 행사되는 한 측면인 것이다. 국민주권주의 또는 민주주의는 성문이든 관습이든 실정법 전체의 정립에의 국민의 참여를 요구한다고 할 것이며, 국민에 의하여 정립된 관습헌법은 입법권자를 구속하며 헌법으로서의 효력을 가진다.
(다) 관습헌법이 성립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관습이 성립하는 사항이 단지 법률로 정할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헌법에 의하여 규율되어 법률에 대하여 효력상 우위를 가져야 할 만큼 헌법적으로 중요한 기본적 사항이 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실질적인 헌법사항이라고 함은 널리 국가의 조직에 관한 사항이나 국가기관의 권한 구성에 관한 사항 혹은 개인의 국가권력에 대한 지위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지만, 관습헌법은 이와 같은 일반적인 헌법사항에 해당하는 내용 중에서도 특히 국가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사항으로서 법률에 의하여 규율하는 것이 적합하지 아니한 사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헌법사항 중 과연 어디까지가 이러한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헌법사항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일반추상적인 기준을 설정하여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고, 개별적 문제사항에서 헌법적 원칙성과 중요성 및 헌법원리를 통하여 평가하는 구체적 판단에 의하여 확정하여야 한다.
(라) 다음으로 관습헌법이 성립하기 위하여서는 관습법의 성립에서 요구되는 일반적 성립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러한 요건으로서 첫째, 기본적 헌법사항에 관하여 어떠한 관행 내지 관례가 존재하고, 둘째, 그 관행은 국민이 그 존재를 인식하고 사라지지 않을 관행이라고 인정할 만큼 충분한 기간 동안 반복 내지 계속되어야 하며(반복ㆍ계속성), 셋째, 관행은 지속성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서 그 중간에 반대되는 관행이 이루어져서는 아니 되고(항상성), 넷째, 관행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모호한 것이 아닌 명확한 내용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명료성). 또한 다섯째, 이러한 관행이 헌법관습으로서 국민들의 승인 내지 확신 또는 폭넓은 컨센서스를 얻어 국민이 강제력을 가진다고 믿고 있어야 한다(국민적 합의). 이와 같이 관습헌법의 성립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요건들이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
(2) 기본적 헌법사항으로서의 수도문제
헌법기관의 소재지, 특히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과 민주주의적 통치원리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의회의 소재지를 정하는 문제는 국가의 정체성(正體性)을 표현하는 실질적 헌법사항의 하나이다. 여기서 국가의 정체성이란 국가의 정서적 통일의 원천으로서 그 국민의 역사와 경험, 문화와 정치 및 경제, 그 권력구조나 정신적 상징 등이 종합적으로 표출됨으로써 형성되는 국가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수도를 설정하는 것 이외에도 국명(國名)을 정하는 것, 우리말을 국어(國語)로 하고 우리글을 한글로 하는 것, 영토를 획정하고 국가주권의 소재를 밝히는 것 등이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기본적 헌법사항이 된다고 할 것이다. 수도를 설정하거나 이전하는 것은 국회와 대통령 등 최고 헌법기관들의 위치를 설정하여 국가조직의 근간을 장소적으로 배치하는 것으로서, 국가생활에 관한 국민의 근본적 결단임과 동시에 국가를 구성하는 기반이 되는 핵심적 헌법사항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도의 문제는 내용적으로 헌법사항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도 국가의 정체성과 기본적 조직 구성에 관한 중요하고 기본적인 헌법사항으로서 국민이 스스로 결단하여야 할 사항이므로 대통령이나 정부 혹은 그 하위기관의 결정에 맡길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3) 수도 서울의 관습헌법성 여부에 대한 판단
(가) 우리 헌법전상으로는 ‘수도가 서울’이라는 명문의 조항이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서울은 사전적 의미로 바로 ‘수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여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이래 600여 년 간 전통적으로 현재의 서울 지역은 그와 같이 일반명사를 고유명사화하여 불러 온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서울 지역이 수도인 것은 그 명칭상으로도 자명한 것으로서, 대한민국의 성립 이전부터 국민들이 이미 역사적, 전통적 사실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대한민국의 건국에 즈음하여서도 국가의 기본구성에 관한 당연한 전제사실 내지 자명한 사실로서 아무런 의문도 제기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제헌헌법 등 우리 헌법제정의 시초부터 ‘서울에 수도(서울)를 둔다.’는 등의 동어반복적인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는 헌법조항을 설치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 후에도 수차의 헌법개정이 있었지만 우리 헌법상으로 수도에 관한 명문의 헌법조항은 설치된 바가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우리나라의 역사적, 전통적, 문화적 상황에 비추어 수도에 관한 헌법관습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울이 바로 수도인 것은 국가생활의 오랜 전통과 관습에서 확고하게 형성된 자명한 사실 또는 전제된 사실로서 모든 국민이 우리나라의 국가구성에 관한 강제력 있는 법규범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나) 한편 우리나라에서 수도가 서울인 점의 관습헌법성 인정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서울이 우리나라의 수도로 설정되고 수도로서의 역할을 계속하여온 역사적 경위를 실증적으로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1) 조선의 창건과 서울의 수도설정
가) 서울은 일찍이 고려시대에 남경(南京)이 설치되어 서경ㆍ동경인 평양ㆍ경주와 더불어 고려의 이른바 삼경제를 이루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역할을 하였다(고려 문종 21년 서기 1067년). 남경은 지금의 서울ㆍ경기지역의 일부지역을 직접 관할로 하였으며 주변지역의 행정중심지로서 궁궐 등 상당한 규모의 도시가 건설되어 있었고 한때 고려의 왕들이 순행을 하며 거처하기도 하였던 곳이다.1
나) 조선왕조가 창건되자 곧바로 천도론이 제기되었다. 공양왕 4년(서기 1392년) 7. 17.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이하 ‘태조’라고만 한다)는 같은 해 8. 13.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2에 한양(漢陽)으로 도읍(都邑)을 옮기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같은 해 9. 3. 배극렴, 조준 등이 “한양의 궁궐이 이룩되지 못하고 성곽이 완공되지 못하여, 호종하는 사람이 민가(民家)를 빼앗아 들어가게 되며 기후는 점차 추워 오고 백성들은 돌아갈 데가 없으니, 궁실과 성곽을 건축하고 각 관사를 배치하기를 기다려 그 후 도읍을 옮기도록 하자.”고 주청(奏請)하였고 태조가 이를 옳게 여겨 초기의 천도계획은 중지되기에 이르렀다.3
다) 그 후 천도 논의는 계룡산(鷄龍山)과 무악(毋岳) 등 새로운 후보지가 등장하면서 도읍지를 어디로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변경되었다. 계룡산의 경우 태조 2년(서기 1393년) 2. 8. 태조는 직접 계룡산하의 후보지를 둘러보고 산수형태, 조운ㆍ도로의 형편 등을 살펴보고 새 도읍지로 결정하였고 이어 건설공사와 함께 관련된 행정구역의 정비까지 시작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 11. 당시 경기좌우도 도관찰사(京畿左右道 都觀察使) 하륜의 불가론에 의하여 다시 새 도읍의 공사는 중단되었다. 당시 하륜은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인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도읍건설을 중지할 것을 주장하였고 태조가 여러 관리들의 검토를 거쳐 이를 받아들였다.4
이후 새로운 후보지로 등장한 것이 무악(지금의 서울 연희ㆍ신촌동)이다. 태조 3년(서기 1394년) 8. 11. 태조는 무악을 직접 둘러보았으나 많은 관리들이 무악이 수도가 될 수 없다고 하고 심지어 송도에 그대로 도읍을 두자는 의견까지 있자 다시 도읍지를 골라보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때 다시 남경 즉 한양이 주목되었다. 이에 따라 같은 달 13. 태조가 한양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왕사(王師)인 자초(自超, 호는 無學)와 여러 재상들이 모두가 도읍을 정할만하다고 하였으므로 태조는 최종적으로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였다.5
라) 공식적으로는 같은 달 24. 도평의사사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정할 것을 상신하여 태조가 정승들의 주청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한양천도를 결정하였다.6 이후 여러 달의 준비를 거쳐 같은 해 10. 25. 한양으로 서울을 옮겼다. 이후 태조 4년(서기 1395년) 6. 6. 한양부(漢陽府)는 한성부(漢城府)로 개편되었고, 태조 5년(서기 1396년) 4. 19. 한성부가 태조의 명을 받아 세운 방명표에 의하면 당시 한성지역은 총 5부(部) 52방(坊)으로 편성되었다.7
마) 이와 같이 이루어진 천도 이후 정종 1년(서기 1399년) 3. 7. 일시 재난과 변란을 피하기 위하여 임금과 신하들이 개성으로 피방(避方)한 이래 태종 5년(서기 1405년) 10. 11. 한성으로 돌아올 때까지 수년간을 제외하고,8 한성 즉 서울은 조선시대 줄곧 수도의 지위를 유지하여 왔다.
바) 이러한 한성의 수도로서의 지위는 성종때에 완성된 조선의 기본법전이었던 경국대전(經國大典)9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한성부(漢城府)에 관한 규정은 이전(吏典) 경관직(京官職) 한성부조(漢城府條)에 들어있는데 경관직은 지방관인 외관직(外官職)과 구별되어 있었고, 그 관할로 경도(京都), 즉 서울의 호적대장, 시장 등의 사무를 관장한다고 명시하여 한성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분명히 하였다.10 이러한 경국대전의 내용은 개정됨이 없이 조선왕조가 유지되는 동안 계속되었다.
2) 일제강점시대의 서울의 수도성 유지
1910. 8. 한일합방에 의하여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는 상황이 시작되었으나 이후에도 경성부(京城府), 즉 서울은 우리나라의 행정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계속하였으며,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1919. 3. 1. 민족대표들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이 선언된 곳이기도 하였다. 한편 위 독립선언에 이은 3ㆍ1운동 이후 같은 해 4. 13. 중국 상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같은 해 9. 11. 제정한 대한민국임시헌법은 제4장에서 임시의정원에 관한 규정을 두면서 임시의정원 의원은 경기ㆍ충청ㆍ경상ㆍ전라ㆍ함경ㆍ평안 각 도 및 중국령 교민, 러시아령 교민에서 각 6인, 강원ㆍ황해 각 도 및 미주(美洲) 교민에게 각 3인을 정한다고(제20조) 하고 있을 뿐 서울에 관하여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고, 그 이후에 개정된 임시정부헌법에서도 이와 같다. 그러나 이 시기에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는데 이 가운데 상해ㆍ러시아령ㆍ한성(서울)의 3개 지역에서 성립된 임시정부들이 상해에 집결하여 헌법ㆍ의회ㆍ서고문(誓告文)ㆍ정강ㆍ강령 등을 갖추어 같은 해 9. 15. 통합임시정부를 구성하였고, 동 임시정부는 비밀 행정 체계인 연통제(聯通制)를 운영하면서 서울에 총판(總辦)을 둔 점 등에 비추어, 비록 일제의 국토강점으로 인하여 국가조직이 와해된 상태에 있었으나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로서의 대외적인 상징성을 유지하였고 임시정부에서도 서울의 수도성을 당연한 전제로 하여 항일활동조직을 편성하였으며 국민들의 의식도 변화가 없었으므로 서울의 수도성은 이 시기에도 사실상 유지된 것이라고 봄이 상당하다.
3) 해방과 건국 이후 현재까지의 서울의 수도성 유지
해방 이후 건국에 이르는 이 시기에 우리나라의 헌법이 제정되었으나 헌법전에는 명문의 수도조항이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서울이 수도임을 전제로 하여 규정된 다수의 개별법률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하여 왔다.
가) 최초로는 해방후 미군정 시대인 1946. 9. 18. 미군정법령 제106호 ‘서울특별시의 설치령’ 제2조에서 서울시는 ‘조선의 수도’로서 특별시로 하며 도와 동등한 직능 및 권한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우리 국민의 대표들에 의하여 서울시의 지위가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미군정청내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1946. 8. 24. 미군정법령 제108호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에 의하여 설치)에서였다. 1947. 2. 27. 위 의원에 제출된 ‘남조선과도행정조직법초안’에서는 제52조 제2문에서 ‘서울시는 특별시로 하야 중앙행정부에 직속케 함’이라고 명시하여 서울만을 특별히 취급하고 있다. 같은 해 7. 30. 논의된 지방자치조직법안은 위 군정법령 제106호의 주요내용을 유지하여 ‘서울시는 조선의 수도로서 특별시로 하고 도와 동등한 직능 및 권한이 있음(제29조 제2문)’을 명시하였다.11
나) 한편 서울시가 특별시의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지방자치법(1949. 7. 4. 법률 제32호)이 제정되면서부터이다. 위 법률은 제2조에서 정부의 직할하에 있는 지방자체단체로서 도와 ‘서울특별시’를 설치하였다. 이에 대하여 내무치안위원장 나용균 의원은 ‘일정시대에는 전부 부군(府郡)이였습니다. 과도정부시에 서울만은 서울특별시라 하고 기타는 부라고 했는데 …… 인구관계라든지 수도의 관계라든지 일본에서도 시행하는 것 같은 동경을 도(都)라고 한 예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고려해 가지고 서울은 특별시라고 명칭을 붙였다’고 설명하여 서울을 특별시로 한 것은 수도의 지위를 고려한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12
다) 현행법을 보아도 1988. 4. 6. 법률 제4004호로 지방자치법이 개정되면서 ‘서울특별시의 지위ㆍ조직 및 운영에 있어서는 수도로서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특례를 둘 수 있다’(제161조)는 규정이 만들어졌고 이에 따라 1991. 5. 31. 법률 제4371호로 서울특별시행정특례에관한법률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의하면 서울특별시는 정부의 직할하에 있으며 수도로서의 특수한 지위를 가진다(제2조). 내무부장관이 서울특별시의 지방채발행의 승인여부를 결정하거나 자치사무에 관한 감사를 하고자 하는 경우 국무총리의 조정을 거쳐야 하고(제4조 제1항ㆍ제2항) 소속공무원임용 및 서훈에 관하여 서울특별시장은 특별한 권한을 가진다(같은 조 제5항ㆍ제7항). 또한 수도권 지역에서 서울특별시와 관련된 도로ㆍ교통ㆍ환경 등에 관한 계획수립과 집행에 있어서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과 서울특별시장이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에는 국무총리의 조정을 받도록 하고 있다(제5조).
라) 이상에서 살핀 입법의 상황을 보면 해방 이후 서울이 수도인 것을 언급하는 법률조항들이 계속 존재하여 왔으나, 이들은 서울이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수도인 점을 이미 존재하는 규범적 전제로서 받아들이면서 이를 기준으로 수도 서울의 특별한 지위를 법률적으로 설정하기 위한 조항들일 뿐, 법률의 차원에서 서울이 수도인 점을 확정하고자 한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입법의 사정은 서울이 수도인 점에 대한 우리 국민의 전통적인 법적 확신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도가 서울로 정하여진 것은 비록 헌법상 명문의 조항에 의하여 밝혀져 있지는 아니하나, 조선왕조 창건 이후부터 경국대전에 수록되어 장구한 기간동안 국가의 기본법규범으로 법적 효력을 가져왔던 것이고, 헌법제정 이전부터 오랜 역사와 관습에 의하여 국민들에게 법적 확신이 형성되어 있는 사항으로서 제헌헌법 이래 우리 헌법의 체계에서 자명하고 전제된 가장 기본적인 규범의 일부를 이루어 왔기 때문에 불문의 헌법규범화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앞서 본 관습헌법의 요건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서울이 우리나라의 수도인 것은 서울이라는 명칭의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이래 600여 년 간 우리나라의 국가생활에 관한 당연한 규범적 사실이 되어 왔으므로 우리나라의 국가생활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형성되어있는 계속적 관행이라고 평가할 수 있고(계속성), 이러한 관행은 변함없이 오랜 기간 실효적으로 지속되어 중간에 깨어진 일이 없으며(항상성),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면 개인적 견해 차이를 보일 수 없는 명확한 내용을 가진 것이며(명료성), 나아가 이러한 관행은 오랜 세월간 굳어져 와서 국민들의 승인과 폭넓은 컨센서스를 이미 얻어(국민적 합의) 국민이 실효성과 강제력을 가진다고 믿고 있는 국가생활의 기본사항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서울이 수도라는 점은 우리의 제정헌법이 있기 전부터 전통적으로 존재하여온 헌법적 관습이며 우리 헌법조항에서 명문으로 밝힌 것은 아니지만 자명하고 헌법에 전제된 규범으로서, 관습헌법으로 성립된 불문헌법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위와 같은 제 요건을 갖추고 있는 서울이 수도인 사실은 단순한 사실명제가 아니고 헌법적 효력을 가지는 불문의 헌법규범으로 승화된 것이며, 사실명제로부터 당위명제를 도출해 낸 것이 아니라 그 규범력에 대한 다툼이 없이 이어져 오면서 그 규범성이 사실명제의 뒤에 잠재되어 왔을 뿐이다.
(4) ‘수도 서울’의 관습헌법 폐지를 위한 헌법적 절차
(가) 어느 법규범이 관습헌법으로 인정된다면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 개정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관습헌법도 헌법의 일부로서 성문헌법의 경우와 동일한 효력을 가지기 때문에 그 법규범은 최소한 헌법 제130조에 의거한 헌법개정의 방법에 의하여만 개정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에 의한 국회의 의결을 얻은 다음(헌법 제130조 제1항) 국민투표에 붙여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헌법 제130조 제3항). 다만 이 경우 관습헌법규범은 헌법전에 그에 상반하는 법규범을 첨가함에 의하여 폐지하게 되는 점에서, 헌법전으로부터 관계되는 헌법조항을 삭제함으로써 폐지되는 성문헌법규범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형식적인 헌법개정 외에도, 관습헌법은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국민적 합의성을 상실함에 의하여 법적 효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 관습헌법은 주권자인 국민에 의하여 유효한 헌법규범으로 인정되는 동안에만 존속하는 것이며, 관습법의 존속요건의 하나인 국민적 합의성이 소멸되면 관습헌법으로서의 법적 효력도 상실하게 된다. 관습헌법의 요건들은 그 성립의 요건일 뿐만 아니라 효력 유지의 요건인 것이다.
(나) 우리나라와 같은 성문의 경성헌법 체제에서 인정되는 관습헌법사항은 하위규범형식인 법률에 의하여 개정될 수 없다. 영국과 같이 불문의 연성헌법 체제에서는 법률에 대하여 우위를 가지는 헌법전이라는 규범형식이 존재하지 아니하므로 헌법사항의 개정은 일반적으로 법률개정의 방법에 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헌법의 경우 헌법 제10장 제128조 내지 제130조는 일반법률의 개정절차와는 다른 엄격한 헌법개정절차를 정하고 있으며, 동 헌법개정절차의 대상을 단지 ‘헌법’이라고만 하고 있다. 따라서 관습헌법도 헌법에 해당하는 이상 여기서 말하는 헌법개정의 대상인 헌법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헌법의 개정절차와 법률의 개정절차를 준별하고 헌법의 개정절차를 엄격히 한 우리 헌법의 체제 내에서 만약 관습헌법을 법률에 의하여 개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관습헌법을 더 이상 ‘헌법’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고 단지 관습‘법률’로 인정하는 것이며, 결국 관습헌법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결과는 성문헌법체제하에서도 관습헌법을 인정하는 대전제와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이므로 우리 헌법체제상 수용될 수 없다.
(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점에 대한 관습헌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른 헌법개정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 경우 성문의 조항과 다른 것은 성문의 수도조항이 존재한다면 이를 삭제하는 내용의 개정이 필요하겠지만 관습헌법은 이에 반하는 내용의 새로운 수도설정조항을 헌법에 넣는 것만으로 그 폐지가 이루어지는 점에 있다. 예컨대 충청권의 특정지역이 우리나라의 수도라는 조항을 헌법에 개설하는 것에 의하여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은 폐지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헌법규범으로 정립된 관습이라고 하더라도 세월의 흐름과 헌법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이에 대한 침범이 발생하고 나아가 그 위반이 일반화되어 그 법적 효력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상실되기에 이른 경우에는 관습헌법은 자연히 사멸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사멸을 인정하기 위하여서는 국민에 대한 종합적 의사의 확인으로서 국민투표 등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 고려될 여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에 이러한 사멸의 사정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앞서 설시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인 것은 우리 헌법상 관습헌법으로 정립된 사항이며 여기에는 아무런 사정의 변화도 없다고 할 것이므로 이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헌법개정의 절차에 의하여야 한다.
라. 수도이전을 내용으로 한 이 사건 법률의 헌법적합성 여부
(1)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인 것은 우리 헌법에 명문의 조항은 없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확립된 헌법관습으로서 소위 불문헌법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 사건 법률은 우리나라의 수도를 서울로부터 충청권의 어느 특정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을 확정함과 아울러 그 이전의 절차를 정하는 법률로서 ‘수도는 서울’이라는 위 불문의 헌법사항을 변경하는 내용을 가진 것이라고 할 것이다.
(2) 그런데 우리나라의 수도의 설정에 관하여 서울이 수도로서 부적합하여졌다는 국민의 합의가 새로이 이루어졌다고 볼 어떠한 특별한 사정도 없으며, 현재로서는 서울이 수도인 점에 대한 국민의 법적 확신이 변화되었거나 소멸되었다고 볼 근거도 없다. 또한 수도를 서울로부터 이전하는 것을 헌법에 명문으로 삽입하여 넣는 취지의 헌법개정이 현행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시행된 바도 없다.
(3) 그렇다면 이 사건 법률은 우리나라의 수도는 서울이라는 불문의 관습헌법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헌법개정에 의해서만 변경될 수 있는 중요한 헌법사항을 이러한 헌법적 절차를 이행하지 아니한 채 단순법률의 형태로 변경한 것으로서 헌법에 위반된다고 할 것이다.
전문 읽기: [결정문] 2004헌마554.566
- 그러나 남경이 설치된 후 경기도 일대를 통치하는 지방행정의 중심적 역할을 하던 서울지방은 고려말에 이르러 다시 한양부(漢陽府)로 개편되었다. 지방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방관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삼경제가 폐지되었고 남경 역시 일반적인 하나의 부(府)가 되었다(서울육백년사, 서울특별시, 1977, 제1권, 144-145쪽). ↩
- 고려후기 국가의 최고 정무기관. 재상을 포함한 주요 중앙부처의 관리들이 국정을 논의하던 것에서 시작하여 주요업무를 직접 시행하는 행정기관으로 확대되었다. 도평의사사는 조선 정종 2년(1400) 의정부로 개칭될 때까지 존재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7권, 27-28쪽). ↩
- 국역 조선왕조실록{세종대왕기념사업회 및 민족문화추진위원회가 1993년 완성한 번역본을 조선왕조실록시디롬(CD-ROM)간행위원회가 1995년 시디롬으로 간행한 것} 중 태조실록 태조 1년 9. 3. 신사. ↩
- 전게 국역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 태조 2년 12. 11. 임오. ↩
- 전게 국역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 태조 3년 8. 13. 경진. ↩
- 도평의사사에서 상신(上申)하였다.
“좌정승 조준, 우정승 김사형 등은 생각하건대, 옛날부터 임금이 천명을 받고 일어나면 도읍을 정하여 백성을 안주시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堯)는 평양(平陽)에 도읍하고, 하(夏)나라는 안읍(安邑)에 도읍하였으며, 상(商)나라는 박(逃)에, 주(周)나라는 풍호(豊鎬)에, 한(漢)나라는 함양(咸陽)에, 당나라는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는데, 혹은 처음 일어난 땅에 정하기도 하고, 혹은 지세(地勢)의 편리한 곳을 골랐으나, 모두 근본되는 곳을 소중히 여기고 사방(四方)을 진정(鎭靜)하려는 것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 전조 왕씨가 통일한 이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자손이 서로 계승해 온 지 거의 5백 년에 천운이 끝이 나서 자연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의젓하게 한 나라를 두시고, 또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國統)을 세웠으니, 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
왕이 분부하였다.
“상신한 대로 하라.”(전게 국역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 태조 3년 8. 24. 신묘) ↩
- 전게 국역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 태조 5년 4. 19. 병오. ↩
- 정종 때 송도로 일시 옮겨간 당시 동기가 변란을 자주 보이는 한양에서 임금이 일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이었고 종묘 등과 관청의 절반이 그대로 한양에 남아 있었다(서울육백년사, 서울특별시, 1997, 제1권, 18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 때에 한양으로 환도하기 위한 논의가 전개될 당시 종묘와 사직을 송도로 옮겨 송도를 완전한 도읍으로 하자는 주장, 제3의 지역인 무악으로 새로이 도읍을 정하자는 주장이 존재하였다. 이는 오랫동안 근거지로 삼았던 개경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관료들과 태조의 뜻대로 한양으로 옮겨가려는 태종의 의지가 서로 충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종묘에서 위 세 곳을 대상으로 점을 쳐 길(吉)함이 많이 나온 한양으로 돌아갈 것이 정해졌다(전게 국역 조선왕조실록 중 태종실록 태종 4년 10. 6. 갑술). ↩
- 조선 건국초의 여러 법령을 종합하여 만든 통치의 기본이 되는 통일법전. 세조는 즉위 후 당시까지의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만세성법(萬世成法)을 이룩하기 위하여 통일법전 편찬에 착수하였고 여러차례 개수를 거쳐 성종 때인 1485년 완성되었다. 영세불변의 조종성헌(祖宗成憲)으로서 통치의 기본법전이 되었고 이후 개정되는 경우에도 조문을 삭제하지 않는 신성성을 지니고 있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1권, 839-840쪽). ↩
- “掌 京都 口帳 市廛 家舍 田土 四山 道路 橋梁 溝渠 逋欠 負債 鬪毆 晝巡 檢屍 車輛 故失牛馬 烙契 等 事”(經國大典 吏典 京官職 漢城府條). ↩
- 그러나 당시 의원들은 지방자치법 역시 헌법에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보고 헌법에 해당하는 ‘남조선과도약헌’의 지방제도부분이 확정될 때까지 위 법안의 처리를 보류하였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속기록 제123호 13쪽. ↩
- 제헌의회 속기록(제3권) 제2회 26호, 46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