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기1 :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김기협. 너머북스.

원칙과 상식을 낯설어하는 사회.

1.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1945년 8월 1~15일)

포츠담 회담에 나타난 원자폭탄. 원폭의 참혹성은 인간성의 증발이었다. 깨닫지 못한 美 시민. 38선. 다급해진 총독부가 붙잡고 매달린 인물-여운형, 그리고
(송진우). 일본의 칼자루 ‘항복’. 일본이 망할 줄 시인은 정말 몰랐을까? 독일 항복 이후 급격한 판세 변화. 반 년은 더 갈 것 같던 전쟁은 원폭으로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일본 15일 항복선언을 앞둔 총독부의 사전대비. 친일파도 아니면서 공산주의자도 아닌 적절한 사람 찾아 세우기.

2. 항복을 선언했으나 아직 항복하지 않은 자들 (1945년 8월 16~31일)

여운형과 안재홍의 건국 준비. 건준위원회. 안재홍 퇴임. 총독부는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좌익의 움직임. 조선의 기독교와 민주주의. 식민지배가 키워준 지주층의 ‘민족자본’. 그들의 향방. 적당히 구슬려서 죗값을 치르게 하고 잘 타이르면 얼마든지 훌륭한 인재로 쓰였을 법한 사람들. 소련군의 인민위원회 지지와 지원. 정회(町會). 동회. 민중과의 접점. 건준을 외면한 자본가집단. 얄타의 배신, 폴란드의 비극. 식민지 시대의 엘리트계층. 황폐한 이념시장 안의 ‘적대적 공생’. 극좌와 극우가 성행하게 된 배경.

3. 남과 북 점령군의 서로 다른 모습 (1945년 9월 1~15일)

건국의 주체가 되지 못한 건준. 맥아더의 정치력? 전무. 전쟁광. 뼛 속까지 군인 정신. 대립을 즐기는 무식쟁이.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의 결별. 임시정부의 가치? 임정의 법통 계승은 차치하고서라도, 임정이 정말 ‘뭘’ 했나? 뭘 하지 않았어도 좋다. 상징적으로나마 그 오랜 시간을 사라지지 않고 ‘존재’해줬다는 가치. 해방공간의 실패는 우익의 실패였다. ‘해방공간’의 개념. 해방 이후 군정이 들어서기까지. 그리고 건국이 이뤄지기까지. 건국동맹? 여운형이 총독부 이후 본인의 활동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않았나. 건국동맹의 실체? 없었던 것 아닌가. 개별 활동을 이리저리 묶어 곱게 포장한 것 아닌가. 미군과 소련군의 차이? 좌익과 우익의 구분? 통상의 좌익 우익의 구분이 아니었지 않았나. “일본 식민통치자들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좌익으로 규정한 기준에 따라 좌익의 존재가 일차적으로 인식되고, 좌익이 아닌 사람을 우익으로 보았던 것 같다. 당시 우익의 기준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였다. 민족주의 과제를 앞세우는 사람은 우익이고, 사회경제적 문제를 앞세우는 사람은 좌익이었던 셈이다”.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자본주의는 일본의 제국주의와 상통하는 것. 조소앙의 삼균주의. 모두 좌익이라면 좌익이고 우익이라면 우익일 수 있는 애매한 위치. 박헌영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진영으로 좌우를 구분했다.
이것이 적대적 공생의 시초.

4. 댄스홀과 요정이 그토록 번창한 이유는? (1945년 9월 16~30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의 명분과 실제. 김일성의 등장. 소련의 태도-동아시아 전역을 두고 별 관심이 없던, 수동적 태도-. “친일파여, 떨지 마라! 한민당이 있다”. 9월 22일 군정청의 “토지소유권 무변동” 발표. 한민당 인사의 로비에 의한 것이라고 추축하지 않을 수 없다. ‘무조건 항복’에 임하는 일본의 자세. 한 달간 통화량 70% 증가의 의미. 해방/항복을 앞둔 일본의 마지막 추태. “이를 보면 일본 항복 당시로부터 9월 8일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20일 남짓 사이에 거의 배액인 23억만원이나 되는 엄청난 거액을 발행하였다. 이것은 조선 경제질서의 교란, 단말마적인 발악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것으로 이에 따른 인플레의 경향은 날로 심하여 그에 대한 적당한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일본인 경제교란 목적으로 조선은행권 남발」. 매일신보. 45년 9월 28일)”. 시장실패 상황이 발생하면 돈은 돌지 않고 덩어리로 뭉칠 수 있고, 그럴 때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힘을 가진 실체가 된다. 우남 이승만 연구에서 정병준이 돈 문제 밝히는 데 들인 노력. 정치자금 조성과 운용. ‘그 많던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국민당과 한민당. 안재홍의 국민당. 사랑방 정치의 시작. 그 많은 돈을 일본인들은 왜 뿌리고 갔나? ‘융자명령’. ‘댄스홀 사건’. ‘돈 퍼내기’. “해방 후의 조선처럼 생산력이 저하된 사회에서 현금은 매우 큰 힘을 가진다. 숙식만 제공해도 수많은 유민을 조직할 수 있고 약간의 용돈만 뿌려도 수많은 시위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5. 남북 공산주의운동의 갈림길 (1945년 10월 1~14일)

독립운동 최대의 상징, 임시정부. 한국인의 준비된 근대어 한글. 조선어학회. 조선어학회 사건. ‘한글말광’. 사전 편찬 작업. 미군정, ‘어리석음’보다 ‘게으름’이 문제였다. 한국인 고문단 임명? 주체적 역할 없는 자문직. 구성도 여운형과 조만식(구색맞추기용) 제외하면 모두 한민당 일변도. 아놀드 군정장관과 하지 사령관. 미군정 고문단=한민당 군정청 지부. “통역정치”의 등장. 임정의 내부구조. 내부 균열이 생긴지 오래고, 젊은 이들이 뛰쳐나올 정도였다. 박헌영과 김일성의 만남. 한민당과 아놀드의 찰떡궁합. 남한의 공용어가 영어였던 시절. 공용어가 두 개도 아니고 달랑 영어 하나? 미군정의 편의주의, 행정주의. 조직력의 박헌영과 대중성의 김일성.

6. 이승만의 등장 (1945년 10월 15~29일)

맥아더와 이승만과 하지. 한국 귀국 전에 이미 만났다. 그리고 그 사실을 숨겼다. 염불은 싫고 잿밥만 좋았던 이승만. 이승만의 진의? 기회주의자. 약장수. 하지에게 ‘군정’의 의미는 뭐였나? 정치적 감각따위는 전혀 없었던 하지. 미군정이 만들어준 ‘적대적 공생관계’. 한민당을 데려다 앉혀놓고 한반도에 대한 이해는 없었던 미군정. 정무능력 없는 군인들의 머리에서 나온 ‘반공’. 미 국무성과 미 군과의 시각 차이. 루스벨트의 다자주의, 국제주의. 빈센트 극동국장의 확인 발언. 그러나 조선의 현실은 달랐다. 아놀드는 “신탁통치가 미국의 방침이 아님이 틀림없다”고 기자들을 상대로 확언했다. 독립을 위한 내적조건과 외적조건. ‘자립능력’과 ‘국제관계’. 소련군과 미군의 정책 차이에서 비롯된 자립 능력의 수준 차이. 외적 조건이 내적 조건의 달성을 오히려 방해하지 않았나? 하는 물음. “모든 한국인이 식민지시대에 비해 빈곤과 폭력의 위험을 덜 받는, 그리고 한국인의 뭉쳐진 힘으로 발전의 길을 찾을 수 있는 민족국가르 세우는 것이 중도파가 공유하는 지상과제였다. ‘합의’라는 기준에서 해방 당시의 한국인은 훌륭한 ‘자치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2013. 05. 2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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