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23. auribus teneo lupum

피움 굿즈 기모후드집업이 도착했다. 나가는 길에 바로 개시했다. B의 잠옷(?) 사는 겸 같이 산 반팔티도 (무려 당일배송으로) 도착했다. 한 장 꺼내 입었다. 예상 밖에 등판 한복판에 절개선이 있다. 무슨 생각으로 만들어진 디자인적 요소인 걸까.

지난 목요일에 오른쪽 위아래 사랑니를 뺐다. 마취주사 약효 빡세게 돌 때는 이가 빠졌는지 뭔지도 감각도 없었는데 저녁부터 슬슬 아프던게 다음 날에는 아주 짜증이 나게 아팠다. (리터럴리) 말도 못할 상황이라 과외도 취소하고 하루종일 약 먹고 자고, 일어나 죽 먹고 약 먹고 자고 반복했다. 당일도 아닌데 말하는 거 지장 없겠지, 속 안 좋은 것도 아닌데 굶지야 않겠지, 자만했던 나년 반성한다.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가서 발치했는데 한밤중 돼서야 흰죽 먹고 그 뒤로 한 이틀간 소고기야채죽-흰죽-곰탕-소고기야채죽 먹었던 것 같다. 좀 나아지면서 쌀국수도 먹고 파스타도 먹고 피자도 먹고 짬뽕도 먹음. 왼쪽도 전부 빼야 하는데 내년도에 이걸 견딜 수 있을만한 일정이 나올까 약간 걱정이다. 상하 전부 매복 사랑니여서 전부 찢고 다시 꿰맸다. 이 빼고 다음 날 가서 소독받고, 이제 내일 가서 실밥 푼다.

내일 B의 집에 가서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선물(?)로 가져가려고 와인을 두 병 사두었다. 사랑니 때문에 정작 내가 많이 못 마시지 않을까 싶어 미리부터 억울한 중. 아직 내일의 분위기가 잘 상상되지 않는데, 이게 희한하게 오히려 나이를 먹고 더 둔해진 건가, 심적 부담이 크지 않은 게 좀 이상하다. 유일하게 하나 걱정되는 건 논문 얘기가 나오는 건데… 1000% 나올 거니까 공부라도 다시 해가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아빠가 4370만 원 보이스피싱 당했다. 온 집안이 다 뒤집히고 재난 같은 하루가 순식간에 흘러가버렸다. 우리집 가장이신 창조주와 ‘의외로 성실한 K-장녀’의 헌신으로 하루만에 급한 불은 껐고, 대강의 상황이 일단락 되었다. 잃은 돈을 되찾는 건 거의 가망이 없겠지만 여하튼 이제는 경찰 수사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내내 아빠의 상태를 걱정하긴 했지만, 한숨 돌리고 나면 정말로 위로와 위안이 필요한 것은 엄마일 것이다. 진정한 최고의 위로와 위안은 입금이겠지만 나는 모아둔 돈이 없다.

이사를 고려하고 있다. 코로나 상황이 이렇게 지속된다면 차라리 이제 방을 빼는 것이 낫다는 계산이다. 처음 이사를 결정했을 때처럼 학교에 자주 가야하는 것도 아니고. (얼마 전에 같은 층에 확진자가 나왔었는데, 나는 거의 보름 정도를 안 나가던 중이었다. 부러 계산해본 적 없었는데 깨닫고 나니 좀 웃겼다.) 그러면 집2에다가 짐을 부리고 대충 서재 비슷한 공간을 만들고, 집3의 쉐어 한 칸에 들어가 월세를 내야 할 것이다. 월세 부담이 반으로 줄어들 수 있다. 문제는 TA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고, RA는 여러 일이 있기 전부터 그만두고 싶어 한참을 고민하던 차여서 좀 답이 없다. 올 한해 가르쳤던 고3이 연락와서 재수도 고려하고 있다고 얘기하는데 정말 나 돈만 벌자고 내년에도 얘 가르치면 참 편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건 이뤄져서도 안 되고 이뤄질 리도 없지.

겨울에 접어들면서 코로나 상황이 훨씬 더 악화되면서 연초-연중보다도 집에만 있는 시간이 훨씬 더 길어졌다. 길게는 나흘 가까이 혹은 그 이상 현관 밖을 벗어나지 않은 적도 자주 있다. 나는 집에 있으면 생산성과 효율성이 엄청나게 떨어지는 사람이여서 애당초 해야하는 모든 일들을 전부 밖에서 처리하고, 일정 사이에는 시간이 비어도 집에 들어가지 않는 편이다. 그저 지금 사는 이 동네가 들고나기 불편해서가 아니라 교통의 요지 한복판에 살던 시절에도 그랬다. 본투비 집순이로 살 수 없는 운명이다.

나는 점점 이 좁디좁은 사각형 천장이 어마어마한 답답함과 무력함, 무기력으로 나를 이끄는 것을 느끼고 있다. 창문을 열어봐야 맞은 편 창문밖에 보이지 않고 시야는 항상 가로막혀 있다. 몇 달 전부터 집3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단히 넓지도 않은 집이긴 하지만, 방이 있고, 주방이, 거실이, 베란다가, 다용도실이 따로 있고 창 밖에 마당도 놀이터도 나무도 보이는 집에서 지내고 싶다. 거실 소파에 앉아 햇살 따뜻한 아침을 보내고도 싶다. 처음에야 필요에 의해서였지만 그 다음은 그저 살기 싫어서 다시 뛰쳐나온 곳이었는데, 토끼 죽을 때 머리 돌리는 것마냥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짙다. 진정으로는, 사실 전부 지쳤다는 느낌이 가장 강하다. 그냥 다 모든 게 다 힘에 겹다. 누군들 안 그러겠느냐만 올해는 정말 답이 없네 답이 없어.

댓글을 답시다 두비두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