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27. (계속2)

영화보고 왔다.

한줄 요약: 휴지 챙겨가길 잘했다.

혼자 가서 봤다. 일부러 100석도 안 되는 작은 상영관으로 갔는데 거의 다 찼다.  도중에 눈뽕 넣는 개샛기들이 유독 많았다. 그렇게 폰이 보고싶으면 영화를 보지를 말았어야지 시발럼들.

여하간. 나는 소설은 그냥 (일부러) 별 기대없이 서점 갔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말았는데, (작가님, 편집자님, 기타 출판 관계자님 죄송합니다) 그저 좀 무미건조하게 읽혔더랬다. 많이들 지적한 것처럼 오히려 현실보다 훨씬 더 낫기도(?) 하고, 뭐 딱히 소설 같아서라기보다는 그냥 내용적인 면에서 그 무렵의 이슈들과 맞물리면서 소위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생각했다. 마치 장강명처럼. 뭐 그렇다고 문학적으로 막 별로다 그런 얘긴 아니고, 하여튼 방점이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래는 스포(?)주의.

영화는 영화여서일까. 내가 정유미를 무한 애정하는 탓일까. 연기의 힘은 정말로, 대단하다. 김미경 배우님 주저앉는 순간에 나도 (앉아있으면서) 주저앉을 뻔했다. 친정엄마가 오빠들 공부시킨다고 ‘하필 청계천에서 미싱을 돌렸고’, 그때에 생긴 큰 상처를 여전히 몸에 지닌 채 살아가며, 어린 딸아이는 엄마의 꿈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존재가 엄마의 미래를 막은 건 아닌지 되묻고(사내새끼였어봐라 그런 걸 묻나), 회사에선 보안요원이 여자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하고, 그걸 본 회사 남직원들은 단톡방에서 그걸 공유하고, 졸지에 피해자가 된 여직원들은 자기 눈으로 자신의 피해 여부를 확인하고 또 경찰서에 가야 하고, 김 팀장은 업무 중 회의 시간에 상사로부터 엄마 없이 자란 애는 어딘가 문제가 생겨도 생긴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들으면서도 꿋꿋하고, 거기다 ‘명예남성’다운 면모로 기획팀 구성을 전원 남자로 채우고, 길거리에선 유모차 끌고 나와있는 엄마를 보고 “남편이 벌어오는 돈 받아 집에서 애나 키우는” 인생 쉽게 날로먹는 사람 취급하고, 카페에서는 맘충이라느니 노키즈존을 가야한다느니 빻은 말이 서슴없이 나오고, 아픈 며느리 위한다고 보약까지 해서 보내는 ‘착한’ 시어머니가 자기 새끼 육휴 한다는 소리에 나자빠져 소리를 질러대고, 스토커인지 뭔지 쓰레기 같은 새끼가 따라 붙어서 새하얗게 질린 딸내미한테 치마가 짧다느니 학원을 왜 그리 멀리 다니냐느니 종국에는 굴러오는 바위를 피하지 못하면 못 피한 놈이 잘못이라는 개소리를 심지어 지 딸에게 하는 아버지가 있고.

집안 돈줄이 된 가련한 미싱공 소녀부터, 몰래카메라, 웹하드와 디지털성범죄, 한남 단톡방 문화, 워킹맘, 경력단절여성, 산후/육아우울증, 맘충과 노키즈존, 뭐 할 수 있고 넣을 수 있는 얘기는 다 넣었지 싶었다. 하여간 다소 노골적인(?), 뭐랄까 ‘전형성’에 기대는 것 같은 메시지들이 적잖이 눈에 밟히기도 했지만, 막상 그렇다고 지금을 살아가는 82년생 김지영’들’의 삶이 저보다 나았던가 물으면 그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보게 만드는 게 더 좋겠지.

지영이가 친정엄마의 엄마로, 자신의 외할머니로 변한 순간이 너무 아팠다. 외할머니를 대신해 어머니를 지키는 지영이도, 금 같은 내 새끼, 옥 같은 내 새끼하며 단장의 눈물을 보이던 어머니도, 참을 수 없게 아팠다. 엄마 나가 일하는 동안 우리 키운다고 같이 살았던 할머니도 자주 말했지. 니 엄마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니 엄마 힘들게 하지 마라, 라고. 할머니는 우리 삼남매보다 엄마가 훨씬, 훨씬 더 아팠을 텐데. 할머니 보고싶다.

그게 누구이든, 이 사회에서 딸-엄마-외할머니는 아들-아빠-친할아버지와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를 공유하게 된다. 쉽게 말로 옮길 수 없는 그 정서들.

정신과 선생님이 정상인 (한남 말고) 사람이라서 다행이었다.  여기저기서, 무언의 여성 연대가 조금씩이나마 비쳐서 다행이었다. 지석이 여느 엄마아들 같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남편이 여느 남편들 같지 않아서, 그리고 육휴를 해서 참 다행이었다. 지영이 다시 글을 쓰고, 그로부터 자신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래서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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