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14. short-cut

쇼트-커트. 나의 머리는 ‘탈코’인가? 아니, 아니다.

그러면 나의 머리는 탈코가 아닌 것인가? 아니, 그것도 아니다.

대략 8주 전쯤, 머리를 짧게 잘랐다. 나는 2007년에 숏컷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남자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샤기컷 비스무리한 스타일이었다. (그때 유행했던 그 샤기컷이 지금 ‘탈코’의 전형처럼 여겨지는 숏컷보다도 길다.) 머리 자르고 얼마 안 있어서 커피프린스가 시작했는데, 보는 사람마다 윤은혜를 따라한 거냐고 물었다. 그럼 나는 내가 먼저 잘랐는데? 하고 대답했다. 윤은혜 머리가 나보다 훨씬 길고, 훨씬 더 ^여성적^이었다.

민증 사진을 찍을 때쯤엔 어깨선을 밑돌았다. 한참 길러 허리쯤 갔을 때 동그랗게 단발을 쳤다. 그땐 주준영이 예뻐서 따라서 잘랐다. 대학에 올때쯤 다시 길러있었고, 중간에 한번쯤 또 다시 동그란 단발을 했었다. 졸사를 찍을 즈음엔 허리선에 얼핏 가닿았다. 그리고 2016년 가을에, 그러니까 근 십여 년만에 다시 숏컷을 했다. 기를 생각 없이 달마다 머리를 다듬고 다운펌을 했다. 바리깡을 대기 시작했다. 막상 졸업식 학사모 쓸 때는 숏컷으로 있고 싶지 않아 쉬는 사이 다시 머리를 길렀다. 겸사겸사 원서도 넣어야 했다. (이게 그래서 코르셋이냐, 물으면 난 딱히 부정하고 싶진 않다. 까짓 그럴 수도 있지 뭐.)

단발로 기르던 머리가 애매하게 다시 어깨선으로 내려앉을 즈음, 어느날부턴가 익숙하던 헤어밴드가 안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너무 축축 가라앉는 게 싫었다. 그래서 다시 잘랐다. 그런데 웬걸. 고작 2년의 사이에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2016년 숏컷을 했을 땐, 그게 뭐 설령 탈코니 뭐니 해도 아무도 거기에 그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다. (지금만큼 전국민이 그게 뭔지를 알지도 못했다.) 그리고 다 떠나서 나는 그 머리가 솔직히 ㅈ나 잘 어울렸다. 봤으면 당신도 부정할 수 없을 걸? 근데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저 종종 기분 내키는 대로 해왔던 바로 그 숏컷을 했다는 사실로, 어떠한 ‘특정 부류의 인간’으로 취급받을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런 취급’으로 인해 피해자가 두개골이 드러날 정도로 폭행을 당한 사건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고 있다.)

탈코르셋은 페미니즘을 운운하는 사이에서도 함부로 강권할 수 없는 문제다. 그걸 또 다른 평가의 준거로 삼는 순간, 망하는 거다. 왜 ‘해방’을 ‘강제’로 시키나? 두어 달 전에 숏컷을 한 나는, 여전히 네일샵에 가서 비싼 돈을 발라가며 주기적으로 네일을 받는다. 눈썹 왁싱을 받으러 왁싱샵에도 주기적으로 간다. 가끔 내키면 속눈썹 연장도 한다. 그러곤 또 화장을 하지 않는다. 선크림/선스틱이 아침 화장대 앞 루틴의 마지막이다. 나는 ‘안 예뻐질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예뻐보이는 것‘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예쁜 게 얼마나 좋은데?

나는 내가 그냥 숏컷이 ㅈ나 잘 어울리니까 자꾸만 한다. 그게 내 몸에, 내 눈에 익숙한 스타일링의 일종이다. 거기에 무슨 대단한 의미부여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내가 좋으면 되는 거지. 다시 반복, 해방은 강제될 수 없다. 나는 강제된 해방을 구현한 실체로서 존재하고 싶지 않다. 전선을 끝까지 밀어올려야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이유는 없다. 누군가는 전선 그 자체를 무화시키고, 해체할 수도 있는 거다. 지금은 근데 이게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기라도 한듯, 그렇게들 굴고 있다. 실전페미가 이래서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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