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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서 어언 3주째 시(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의 언어, 함축, 다의성, 비유, 운율, 이미지, 심상, 뭐 그런 것들을 설명해가면서. 수능 언어를 공부하던 시절보다 훨씬 더 꼼꼼하게 교재들을 읽어가고 있다. 그땐 시를 싫어했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시를 마구 즐겨서 읽지도 않았더랬다. 어쨌든 지금에 와서야 열두살 시절 강제와 타의에 의해 암송했던 윤동주의 ‘서시’ 하나가 나의 세계에 꽤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았다. 개인적으로 시를 가르치는 일, 그러니까 함께 낭송(혹은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가르치는’ 일은 썩 즐거운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수능 이후엔 완전히 놓았다고 할만큼 멀어져있던 (특히 교과서용) 시를 다시금 보게된 일은 꽤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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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선가 얼핏 지나치며 읽은 글에서 ‘무언가 문학 작품을 읽고 싶은데,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없을 때에는, 다시 말해 장편소설 같은 긴 글이 읽히지 않을 때라면, 시를 읽어보라’는 말이 있었다. 어제 갑자기 고장나버린 8핀 충전용 라인을 사러 나갔다 시집을 샀다. 지금껏 내 책장에 꽂혀있던 시집들은 단 한 권도 내 손으로 산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변화(?)인 셈이다. 근래에 ‘소와다리’라는 출판사에서 찍어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증보판 복간본 세트와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판한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두 권인데, 후자는 《뼈아픈 후회》가 사고싶었으나 재고 부족으로 대신하여 산 것이다. 고정희 시인의 시집도 한 권 사고싶었으나 어제 들른 서점에는 전연 없어서 사지 못했다. 집에 와 열어보니 시집의 시를 읽기 전에 한자 공부부터 해야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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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며칠쯤 지난 이야기이지만, 다툼이 있었다. 번갈아 술에 취해 뱉어낸 말들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받게 돼버렸다. 아무는 듯 하더라도 이내 다시 터져버릴, 자살폭탄의 도화선 같은 그런 사건이, 결국은 일어나버렸다.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구차하게 싸움을 이어가서는 안 되겠기에 멈추었다. 그렇게 그냥 멀리 치워만두었다. 언젠가는 다시 들춰져 둘 중 하나를 혹은 둘 다를 망가뜨리고 나서야 지나간 흉터가 되거나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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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자려 누우면 머릿 속이 늘 복잡하다. 생각이란 것이 숫제 머릿 속을 까놓으면 손에 탁탁 잡히는 것처럼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거였으면, 냉큼 쥐어다 밖으로 꺼내 저 바닥에 패대기를 치고 싶을만큼. 이걸로 스트레스, 저걸로 스트레스, 이제는 그도 모자라 이런 저런 걸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그 자체도 스트레스. 현대인에게 스트레스란 일상, 삶 그 자체와 불가분의 관계라지만 이 지경에 이르니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어진다. 누워 소설을 읽어도, 음악을 틀어두어도, 심지어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 라디오를 틀어놓아도 잠을 잘 수가 없다. 아주 짧아야 한 시간, 늘어지자면 온 새벽을 그렇게 보내기도 한다. 이러다가 멀쩡한 사람도 미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성과 감성이 항상 치고 받아가며 싸움박질을 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에도 가설A, 가설B, 가설C를 늘어놓으며 플랜A, 플랜B, 플랜C를 차례로 만드는―사실 현실적으로는 그다지 쓸모있는 플랜이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과잉의 상태가 끝이 나려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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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신청 전 시간을 때우려 <한번 더 해피엔딩>이란 드라마를 받았다. 방영중 드라마를 중간부터 보기 시작한 것은 가히 몇 년만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까지 본 것이 7화가 마지막이었고, 글을 쓰는 지금 막 8화가 방영 중이다. 문제는 6화까지 그럭저럭 괜찮던 스토리가 7화부터 갑자기(사실 남주가 정경호라는 데에서 이미 갑자기가 아닐 수는 있지만) 맘에 들지가 않아졌다. 남주나 서브남주의 캐릭터는 얼마든지 보는 사람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다를 수 있지만, 그냥 존중입니다 취향해주시죠 하는 차원에서 내 기준에는 한미모(장나라)와 송수혁(정경호)보다는 한미모와 구해준(권율) 라인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것. 참을 줄도 알고 성숙한 사랑이 뭔지도 아는 멀쩡한 구해준은 질투심 쩌는 연애불구자를 만들어놓고, 지 맘이 어떤지도 감을 못 잡는 ‘레알’ 연애고자와 지 꼴리는대로 고백하더니 설렘은 다른 데서 느끼는 정신나간 여주가 연애하는 스토리를 그려내자고 드라마를 찍었다는 말인가. 이런 허망할 데가. 그사세 때부터 줄기차게 주장(누가 듣는다고ㅋㅋ)하는 바이지만 내게 있어 쓸만한 그리고 볼만한 로코란 곧 ‘여주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무리가 없는’ 드라마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그걸 그냥 포기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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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 네 개와 강의 여섯 개중에 채플 네 개와 강의 두 개를 클리어했다. 남은 네 개 강의도 제발. 그나저나 우선수강 생기면서 좋은 것도 좋은 건데(있기는 한가?) 한 학기 수강신청을 세 번이나 해야한다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