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5. 묵은 일기

어제는 택시 타고 출근하고, 퇴근해서 (구)―여기까지 20200503 03:05에 써놓고 그냥 자버렸다. 원래 제목은 2020. 5. 2. 정리정돈이었다.

금요일 아침 강의를 켜둔 채 선잠에 들어 자며 들으며 들으며 자며 그렇게 아침나절을 시달리다 한참 늦게서야 정신을 차렸다. 택시를 타고 출근을 했고 퇴근하고 바로 집2로 갔다. 언니와 동네 고깃집 가서 삼겹2목살1주먹밥라면소1맥2 조졌다. 신나게 먹고 가게문 나서는 길에 발목이 꺾여 잠시 주저앉았다가, 바로 근처 약국에서 쿨파스를 사들고 귀가했다. 파스 붙이고 아이스크림 하나 까먹고 누워 잠시 놀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새벽 세 시쯤 깨서 한 시간쯤 폰지작 하다가 다시 잠들고, 아침 그럭저럭 일찍 깼다. 간만에 여유있게 나갈 준비했는데 네일샵 원장이 지각한대서 천천히 출발했다.

샵에서 관리받는 사이, 가게 전면유리창 밖으로 (50대쯤 되어 보이고, 옷차림이 그리 깔끔하지 않은, 캔커피를 홀짝거리던) 웬 남자가 유리 앞에 거의 붙어있다시피 서서 매우 더러운 눈빛으로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원장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나를 보고 ‘밖에 지금 누가 쳐다보고 있지 않아요?’라고 물었고, 나는 티비를 한 번 거쳐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밖을 보았다. 그저 지나가는 행객이라고 하기엔 어렵고, 아주 분명하게 의지로 가득찬 시선. 원장은 최근 들어서 남자가 서있는 자리에 가끔씩 레쓰비캔이 놓여있었다 했다. 남자가 사라진 후에 나가서 똑같이 캔이 남아있는지 확인했고, 들어오며 문을 잠갔다. 여느 때처럼 약간은 가볍고 또 호들갑스럽게 너무 기분 나쁜 사람이다 얘기하고 넘어가버렸지만, 나는 네일을 다 받고도 쉽게 문을 나설 수 없었다. 바로 퇴근한다는 원장을 기다릴까도 생각했다. 눈을 마주친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치솟았던지. 젠장맞을 세상.

책 몇 권과 와인 두 병을 챙겨 집1로 돌아왔다. 쿠폰 써볼 겸 부른 가사도우미 여사님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버렸다. 돌아와 물건 정리를 조금 돕고, 이런저런 설명을 조금 덧붙인 뒤에 자리를 피해 운동을 다녀왔다. 다친 발목 때문에 하체 못하고 상체만 했다. 상체 운동은 힘을 쌓는 느낌보다는 한없는 부실함의 자각 타임에 가까워서 좀 덜 재밌다. 여사님 퇴근 15분 전쯤해서 귀가. 워낙 좁은 방이라 빤딱빤딱해질 구석도 별로 없기는 하지만 화장실 거울과 수전 하나는 제대로 깨끗해져있더라. 바닥은 뭐… 뭉게뭉게 뭉쳐있던 먼지 구름 없어진 것만으로도 족하다. 앞으로도 가끔은 쓸 것도 같다. 돈을 주고 노동력을 산다는 건, 내 노동력을 그만큼 아낀다는 뜻이기도 하니. 나는 청소가 재밌고 즐겁다는 사람들이 매우 부럽지만,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순인가? 알 게 뭐람)

3일엔 간만에(?) 지하철로 출근했다. 김밥 사들고 출근해 2/3쯤 먹었다. 요새들어 더 정신이 없다. 6-1로 시작해서, 6-1과 5-1이 섞였다가, 이제 5-1과 5-2가 섞이는데 그 와중에 5-2 하던 것들이 일부 5-1로 넘어왔다. 엉망진창이야 아주. 생각해보니 출제 일정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네. 퇴근하면서 일생각도 일터에 전부 놓고 오는 삶 원해.

어쨌든 마치고는 신나게 퇴근해 고터 갔다. 호남선 타고 올라와 난생 처음 서울 구경하는 사람마냥 메가박스 찾아 걸었다. 지하 돌아다니면서 왠지 코엑스가 겹쳐보여서 잠깐 어리둥절했다. 역시 한강 이남 사람 많은 곳은 나랑은 영 상극이다. 기빨려. 트롤: 월드 투어봤다. 귀엽고 현란하고 촌스럽지만 역시 귀여운 것들 천지―였지만 풍진 세월에 닳고 닳아버린 나는 저 캐릭터는 왜 저 모양일까, 저런 사람이 눈 앞에 있다면 매우 화가 날 것만 같은데, 아이고 답답하다, 생각하면서 역시 나는 이제 틀려먹었다고도 생각했다. 아, 레드벨벳 나오는지 모르고 가서 봤다. 그게 레드벨벳 노래인지도 B가 얘기해줘서 알았다. (근데 여전히 그 노래 제목은 모르고, 사실 이제 노래가 뭐였는지도 기억 안 난다.) 그건 그렇고 난 이제 그런 노래만 들리면 샤로수길 모 맥주집이 같이 떠올라서 짜증이 좀(..)

팝콘 주워먹으며 허기가 좀 가시는 바람에 저녁은 좀 움직였다. 인구밀도 높은 공간 벗어나고 싶어서 메뉴도 가게도 안 정하고 해방촌으로 갔다가 공연히 걸었다. 장고 끝에 악수 아니고 호수(였기를). 나한테야 맨날 먹던 데라서 다른 곳 좀 시도해볼까도 했는데 은근히 어렵더라 싶고 역시 나는 그냥 먹는 데엔 안정추구형 인간. 주말연속극(ㅋㅋㅋ)을 보면서 핫후라이드 뜯으며 오백 석 잔을 천천히 나눠마셨고 나와서는 긴 고민 없이 바로 화로구이집 갔다. 다찌 앉아서 민물새우전 시켜놓고 소곡주 솔송주 준마이사케 마셨다. 사장님이랑 알바양반 식사하신다고 웻지감자에 고로케에 오렌지(맞나?)랑 수박 얻어먹었다. 쓰고보니 ‘식사하신다고’와 ‘얻어먹었다’가 왜 이렇게 이어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상황은 대충 그랬다. 앉아있는 수 시간 가게 문 밖에 수면바지 입고(지금 생각해보니 안 더웠을까 싶은데..) 헤드셋 쓴 남자가 내내 폰을 들여다보며 앉았다가 섰다가 다시 벽에 기댔다가를 반복했다. 이쪽이고 저쪽이고 왜 가게 앞에 자꾸 남자들이 서성이는 걸까. 역시 젠장맞을 세상.

종점까지 걸어내려가놓고 택시는 카카오로 불렀다. 당연히 택시도 오거리에서 내려왔다. 많이도 걸었네 왜 그렇게 걷고 싶었을까 그 날은. 고개 넘어 내려다주고 갈 요량이었으나(아님) 한 잔 더 청해 동네까지 왔다. 늘 가던 집은 문을 닫아 최근에 좀 궁금했던 다른 집을 가봤는데, 들어서보니 어떻게 아직까지 안 망했지 싶더라. 건물주신가…?

벽면 스크린에 굉장히 대중없이 뒤섞인 음악들이 내내 흘렀는데 얘만 유독 강하게 남았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전혀 모르는 곡이었으나 영상 끝나고 물어봤더니 B가 뚝딱 찾아줬다. 신기해(!) 그나저나 졸라 잘생겼어. 입고 있는 블루종도 맘에 든다 아주 그냥 등판까지 딱 그냥. 나는 블랑이랑 인디카, B는 진토닉. 그가 ‘분명히 자기 전까지 통화를 했는데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고 적었던데, 왜 내가 쓰려던 문장이 저기에 있을까.

어젠 다친 발목을 핑계삼아 피티를 미뤘고, 병원을 다녀왔고, 삼짬해장 하려고 큰 맘 먹고 언덕 넘어 청료릿집 방문했으나 쉬는 시간이라 실패했다. 대신 평냉에 녹두지짐을 먹었고, 스벅 가서 논문 읽었다. 자리가 리저브뿐이라 리저브에 있는 샤케라또 비슷한 뭔가를 마셨다. 코코넛 화이트 콜드브루 먹으려고 간 건데, 쩝. 귀갓길 올영 찍고 버스탔다. 돌아와 삼분카레 먹었고, 조금 일찍 누웠다가 다시 책상에 앉았다. 모타운 처음 알게 된 이야기 하다가 오랜만에 드림걸즈 다시 봤다. 모타운 썰들 읽고 나서 영화 보니까 무슨 역사 공부하고 다큐 보는 느낌 같아서 신선해. 제니퍼 허드슨 언제 들어도 잠시 숨 멈추게 된다.

어제는 어제의 것들이, 오늘은 또 오늘의 이슈가 흐른다. 손가놈의 아비가 쓴 글이 (매우 좋지 않은 방향으로) 화제를 몰았고, ’56년만의 미투’라는 꽤나 강려크한 제목으로 성폭력피해자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논의가 시작되었고, 빛과진리교회가 아연실색할 단어들과 함께 검색어에 오르내린다. 오늘의 점심은 쇼유라멘, 디저트는 딸기산도에 아인슈페너, 저녁은 물만두, 야식 먹고 싶네.

많이 복잡하지도 않으면서, 그리 간명하지도 않은 날들.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리 고민하다가 오히려 이름 붙으면 그 이름에 갇혀버릴 것 같은. 세월을 헛살았나, 나이를 헛먹었나, 내가 어떤 사람인 걸까, 나는 무얼 원하나. 아니 그래서 나 연구는 언제 하나? 하긴 하나?

댓글을 답시다 두비두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