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텔레그램 N번방에 있었다 | 에스콰이어 코리아
기획 시리즈를 본 〈한겨레〉 동료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어떻게 그 끔찍한 걸 다 봤느냐’며 어깨를 두드려줬다. ‘기사를 끝까지 못 읽겠더라’고 말하며 인상을 찌푸린 사람들도 있었다. 동료들은 내가 취재한 범죄의 잔혹성이나 잔인함이 나를 힘들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기사가 나가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사회, 여전히 활보하고 심지어 피해자를 더욱 조롱하는 가해자들, 기사를 통해 텔레그램 성 착취 세계에 새로 참여한 사람들의 존재, 보도 이후에도 나에게 ‘대화 좀 하자’며 위풍당당하게 텔레그램으로 말을 걸어온 박사 조 씨의 행동이 나를 힘들게 했다. 기사가 보도되는 와중에도 텔레그램 방에서는 피해자들이 발생했고, 기존의 피해자들은 공포감을 느끼며 더욱 꼭꼭 숨었다. 취재 초기에 가졌던 ‘무조건 잡힌다’는 확신은 점점 옅어졌다. 기자로서 나라는 존재 자체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A의 아픔과 고통보다 가해 행위의 기괴함에 더 주목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사람들이 내가 그랬던 것과는 달리 피해자들의 피해를 나의 것이라고 느끼지 못하고, 특별한 누군가의 피해라고 여기며 한쪽으로 치워두려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피해자들이 고통 속에 외쳤던 피해 사실을 ‘선정적이고 가학적’이라는 이유로 모두 기사에 담지 않은 것이 오히려 문제를 축소시킨 건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다. 내가 기사에 담은 내용은 피해의 단순한 조각일 뿐이었다. 훨씬 더 혹독하고 악랄하고 잔인한 범죄의 현실을 그대로 담아야 옳았을까? 죄책감과 후회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가 고통스러웠던 건 범죄의 잔혹성을 봐야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죄책감과 무력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거대한 n번방’으로 만드는 언론 보도들(한겨레, 2020. 4.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