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죽음에 대한 꿈을 몇 번이나 꾸었던 경험이 있다. 대개는 심하게 아플 때에 죽음에 관한 비슷한 내용의 꿈이 반복됐는데, 그런 꿈을 꾸고 나면 더욱 심하게 앓았던 기억이 있다. 엄청나게 얇은 실 같은 피아노줄(?)이 내 몸을 관통해서 죽어버린다거나, 영혼이 마치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 같은 이미지―전혀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또는 육체가 없는 내 영혼의 시선에서 나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것 같은 장면 등이 반복해서 꿈에 등장했다. 그럴 때마다 죽음에 대한 불명확한 어떤 공포감에 사로잡혔었고, 어린 나이에 그것을 언어화할 만한 능력은 없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못한 채 오로지 머릿속 영상만으로 남아있었다.
청소년 시절에는 자살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었다. 자살을 하고 싶다거나, 당장 죽어야겠다는 의지는 아니었음에도 ‘자살’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을 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하면 아프지 않게 죽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종류의 질문들이었다. 당시는 최진실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 성상납 리스트로 유명했던 장자연 등 유명인들의 자살들이 끊임없이 언론에 보도되던 때였다. 내 청소년기는 교회공동체로부터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기독교와 연관이 깊었었는데, 당시 교계에서는 ‘자살은 죄’라며 ‘그들은 자살을 했으니 천국을 못 간다.’는 둥 고인에 대한 몰상식하고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박한 수준의 이야기들이 공공연히 나돌기도 했다.
내 친구 J는 전공이 사회복지학이어서 여러 봉사활동과 실습을 통해 경제적 어려움이 있거나 사회복지 서비스의 수혜를 받아야만 하는 소외 계층을 자주 접하는 편이다. 한번은 그가 봉사활동 과정에서 사례관리를 나갔을 때, 자살시도의 경험이 있는 클라이언트를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 클라이언트에게 있어, 자살은 너무나도 살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선택하게 된 방법이었다. 비단 그 사람뿐만이 아니라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살고 싶어서’ 자살을 택한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너무나도 힘든 이 현실에서 그들이 선택 가능하다고 느끼는 유일한 돌파구가 죽음이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J와 나는 ‘어떤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 사람들이 더 용기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나 스스로에게도 삶의 의미나 죽음에 대한 문제를 물어본다면, 내게 있어 삶은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지 살아서 행복한 것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하여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삶이 죽을 만큼은 고통스럽지 않다는 핑계로, 삶과 죽음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고 그냥 근근이 살아내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으로 내 삶을 과연 얼마만큼이나 바꿔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너무나도 초라해지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죽음으로 삶을 완성’할 수 있으려면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나의 의지와 결정이, 판단이 올바르게 작동해야 하고, 원하는 결과로 나타나야 하겠지만, 내게 있어 인생이라는 것은 내 맘대로 되는 것보다 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나는 나의 지나간 인생에 대해서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고, 또래의 어느 누구보다도 주체적인 방식으로 삶을 꾸려왔다고 자신한다. 입학할 고등학교도, 공부하고 싶은 과목도, 심지어 등교를 하는 시간과 강제야자에 참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 까지도 나는 거의 ‘내 멋대로’ 수준으로 결정하며 살아왔다. 고3시절 대학에 지원할 때는 모든 접수절차를 거쳐 마지막 원서비를 내는 시점에야 부모님이 내가 지원하는 학교와 전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셨다. 그만큼 나는 자유롭게, 내 뜻대로 나의 인생을 꾸려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랬었는데. 요즘엔 조금 다른 생각도 든다. 사실은 스스로에게 변명하기 위해, 정당화하기 위해 뒤늦게야 나의 결정들은 그만큼 옳았다라고 나를 설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정말로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결정들을 내려온 것일까? 여한이 있고 없음 혹은 후회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를 떠나서 본다면, 내가 나의 과거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주체성’과 ‘독립성’은 일종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내 삶의 결과에 대해 긍정할 수 있어야만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으므로’, 나는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차후에 스스로에게 강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우리가 ‘죽음으로 삶을 완성해야’한다면 우리에게는 이미 정해져있는, 잘 다듬어지고,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삶의 표본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각기 사람들에게 다를 수 있다는 점을 함께 전제한다고 해도 여전히 그 명제는 일종의 ‘이상적 삶’의 존재를 요구로 한다. 그 지점에 있어서 나는 그 명제가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언제고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죽게 될지 한치 앞을 모를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 내에서는, 어떠한 삶도 그냥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최근 이어진 숱한 사례들. 강남역 인근 공중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살해를 당한 이십대 여대생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도 완성되었다 일컬어질 수 없다. 스크린도어를 고치다가 전동차에 치어 죽은 열아홉 청년의 삶 역시도, 감히 누구도 그 죽음을 완성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차가운 바다 속 세월호에서 생명의 끈을 놓쳐야만 했던 아이들과 어른들은 어떠한가. 그들이 이루지 못한 꿈, 세상에서 펼치고 싶었던 자신의 미래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어떤 구조와 사건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거기에는 그들이 완성하고 싶지 않았음에도(!) 강제로 ‘종료’ 당한―그러니까 ‘완성’ 혹은 ‘완료’조차 되지 못한― 삶만이 있을 뿐이지 않은가. ‘생生의 완성’이라는 말은, 그 단장의 슬픔, 애통과 비탄의 사건들 앞에서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결국은, 완성될 수 없는 삶을,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저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며,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오롯이 나의 것으로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 차라리 좋지 않을까. 그것을 인정한다고 갑자기 나의 삶이 그 자체의 의미를 잃는 것도 아니요, 내가 살아야하는 이유가 증발해버리는 것도 아닐 터이니. 그저 완성할 수 없는 삶이라고 할지라도 살아내는 것, 죽음 따위와 관련 없이도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충실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 편이 나의 삶을, 그리고 ‘죽음’을 더욱 충만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2016. 6. 1. 쓰고 2017. 1. 19.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