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차별에 찬성한다고? ― ‘우리 밖’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게 보내는 유감

불편했다. 서점을 둘러보다 가판대에서 이 책을 발견할 때면, 책에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을 만큼 불편하고 거슬렸다. “‘우리가 차별에 찬성’한다고? 우리가 누군데?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이라고? 그 괴물을 누가 만들어냈는데? 거기다 정말 이게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나? 이런 건 대체 누가 읽어야 하는 책이지? 이미 괴물로 취급받는 20대? 아니면 괴물을 만들어 낸 기성세대 어른들?” 마음 속에선 끝없이 질문이 이어졌고, 생각하다 보면 억울해졌다. 그래서 ‘자기계발’에 대한 이야기 이전에, 이 책이 나에게 주는 불편함에 대해 먼저 풀어보려고 한다.

어쩌면 편견일지 모르지만, 근래 들어 각종 사회현상 중에서도 ‘20대’를 특정 대상으로 겨누어 문제를 부각하는 분석이 많아진 것 같다. 이 책을 포함해 그런 뉴스와 담론들을 접하다 보면, 이 시대 한국의 청년들은 하나같이 사회 정의와는 멀찍이 떨어져 서서, 오로지 생존만 생각하고, 정치에도 무관심하고, 투표도 하지 않고, 타인과의 연대 의식도 없고, 차별을 당연시하는, 학벌주의의 노예 같은 존재로 읽힌다. 87년 세대 전후의 ‘20대’와 ‘청년’, 그리고 ‘대학생’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진보를 이끄는 희망적인 존재들로 대우받았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거칠게 표현해서 ‘20대 개새끼론’이라는 표현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20대 청년들 역시 그런 분석에 적극 공감하고, 더 나아가 내면화하는 수준에 이른다.

과연 그러한가? 개강이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중순, 각종 신문과 방송에서 대학생들의 ‘학과 야구잠바(일명 과잠)’ 문화를 소개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올 때 내가 SNS에서 주로 접했던 기성세대의 반응은 “요즘 20대들은 부끄러운 줄을 모르나봅니다. 특히 명문대 명문학과,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학생들조차도 같은 청년 세대가 겪고 있는 학벌주의의 폐단, 더 나아가 주거불안, 빈곤 등의 문제에 아무런 이해와 공감이 없다는 건 큰일 아닌가요?”하는 식이었다. 과잠 하나에서 순식간에 청년 세대의 타인에 대한 몰이해와 공감능력의 부재를 읽어내는 비약적 논리 전개도 감탄스럽지만, 이런 반응의 기저에는 ‘내가 너희들보다는 낫다’는 일종의 도덕적, 윤리적 우월감이 깔려있는 듯 보인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이재명 현 성남시장의 페이스북 글 하나가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다. <한심한 대학생에 한심한 지도교수, 그리고 한심한 대학>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시작하는 이 글에서 이 시장은 “들은 바로, 상당수 대학생들이 이번 선거일에 MT를 간다고 한다”며 “청년들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선거에 관심도 기여도 하지 않으면서, 정치가 자신을 배려해주길 바라는가? 청년의 정치무관심이 오늘날 청년문제가 심각해진 원인의 하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대학생들을 싸잡아 매도하고, 청년문제는 일면 청년들이 문제여서 더 악화되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이어진 댓글 역시도 ‘저런 대학들은 지원금을 끊어야 한다’거나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한 학생들이 저리 많으니 이 나라의 앞날이 캄캄하다’는 둥의, 대학생과 청년을 향한 근거 없는 비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성세대가 보는,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가 그려내는 “요즘 20대”에 포괄되는 것을 거부한다. 명문 고등학교를 나오지는 못했지만, 소위 명문 대학의 명문 학과에 속한 나는, 그저 추울 때나 특별히 옷을 차려입을 필요가 없을 때, 편하게 활동하고 싶을 때 과잠을 입는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고등학교 학생들끼리도 야구잠바를 맞춰 입는 오늘날―지금까지 내가 직접 확인한 고등학교만도 세 곳이 넘는다. 소위 ‘명문’고가 아닌데도 그렇다.― 왜 하필 명문대의 잠바에만 특정한 심리와 의미가 깃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명문대라는 학벌만큼이나 타인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대기업 사원들이라면 으레 착용하고 다니는 회사 뱃지에서는 읽어낼 수 없는 또는 읽어내려 하지도 않을 논리가 왜 ‘대학생’에게만 강요되는가.

게다가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4월 13일은 전국의 모든 대학이 학사일정상 중간고사를 치르기 직전인 시기이며, 어떤 대학에서도 어떤 학생들도 그런 시기에 MT를 가지는 않는다. 이재명 시장이 스스로 밝혔듯 선거일에 MT를 간다는 대학 역시 학교명도 학과명도 밝혀질 수 없는 그저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들은 풍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라는 거대한 무리를 하나의 균일한 집단으로 규정해버리고 매도하는 방식은 20대를 제외한 모두에게 아주 ‘편리한 핑계’이므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된다.

나는 지난 7학기의 등록금을 모두 장학금과 대출로 간신히 메웠으며 다음 8학기 역시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2~3개쯤의 알바는 기본이고―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조건들이 내게는 자기계발의 기회로 작용했다―, 지금도 반지하방에서 여름에는 곰팡이와 싸우고 겨울이면 한파와 싸우곤 한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저는 알바도 하는 학생이 아니라 공부도 하는 근로자인 것 같아요”라고 스스로를 소개할 때도 있다. 내게 있어 자기계발은 타인으로부터 나를 차별화하기 위해 남아도는 시간에 돈을 써가며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해내야만 하는, ‘생존을 위한 돈벌이’, ‘졸업 후 생계를 꾸려갈 직업을 갖게 해줄 조건’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자유로워지라고?

흔히 말하는 자기계발, 그것도 기초 중의 기초라는 ‘영어’를 준비해두지 않아서 절망스러웠던 경험도 있다. 작년 가을부터 5개월간 일했던 로펌 K에서 근무를 마칠 무렵 일했던 팀의 부장님이 진심어린 목소리로 “OO씨가 기대보다도 일을 너무 잘 해줘서, 영어가 조금만 되면 진짜 내가 바로 스카웃해서 같이 일하고 싶은데, 영어가 안 되니까 함께 할 수가 없어서 아쉽네.”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가 설령 K의 직원이 되고 싶지 않더라도, 그 순간 내 영어실력이 그렇게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평생을 다닐지 모르는 직장과 평생을 함께할지 모르는 동료들이 누구일지를 결정하는 게 ‘영어성적’일 수 있다면, 누군들 그 앞에서 초연해질 수 있겠냐는 말이다.

저자의 시각에서 20대는 “괴물이 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존재이고, “부당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로서 그런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존재”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괴물이 아니다. 저자는 또한 “시원한 해결책 하나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면서, 사회학적으로 조망해본다는 미명 아래 고의적으로 이십대들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들에 확대경을 들이댄 꼴은 아닌”지 “이십대들에게 미안했다”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견고한 사회구조의 벽 안에서 어떻게든 한 줄기 숨이라도 쉬어보겠다는 20대와 대학생을 이렇게 단순하게 ‘괴물’로 규정해버리는 것은, ‘미안하다’는 한 마디로 무마하기엔 너무 잔혹한 처사인 것은 아니냐고.

결국엔 내가 하는 말 모두가 일종의 변명처럼 보이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대학생의 65%가 타대생의 과잠에 적힌 대학 이름을 ‘일부러’ 확인한다면―그 숫자가 과연 어느 정도의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지조차도 심히 의심스럽지만―, 그래서 그것이 20대 내부의 견고한 학벌주의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한다면, 그 65%의 반대에는 타대생의 과잠에 적힌 대학 이름에 관심이 없는, 다시 말해 학벌로 자신의 위치를 타인과 비교하려들지 않는 대학생 역시 35%나 존재한다는 것을. 저자가 읽어본 2천여 장의 에세이, 그리고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던 50여 명의 학생들로도 감히 일반화될 수 없는 셀 수 없이 많은 다양한 20대들의 궤적이 각기 존재한다는 것을. 책을 덮은 뒤에도 나는 여전히 저자 오찬호의 ‘우리’가 누구인지, 과연 ‘이십대’가 괴물인 것이 맞는 건지, 무엇이 ‘자화상’인지 이해할 수 없다.

/ 2016.  4. 11.

[daum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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