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구할 여자들. 카트리네 마르살. 김하현 역. 부키

카트리네 마르살, 『지구를 구할 여자들: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과학기술사 뒤집어 보기』 (2022, 부키)

20221214 수요일 밤 완독. 20221217 같이 읽어요 진행. 북펀드 참여.

1장.

제목 그대로 “가방에 바퀴를 다는 데 왜 5000년이나 걸렸”는지 그 바보같음의 근원이 젠더 관념 때문임을 지적. “왜냐하면 공교롭게도, 세상은 특정 남성성 개념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사람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남자는 채소를 먹지 않는다‘ ‘진정한 남자는 사소한 문제로 건강 검진을 받지 않는다’ ‘진정한 남자는 섹스할 때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다’ 같은 믿음이 말 그대로 매일같이 피와 살이 있는 진정한 남자들을 죽이고 있다. 남성성은 우리 사회가 가진 가장 고집스러운 개념이며, 우리 문화는 종종 특정 남성성 개념을 보존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34-35]라는 지적에서 웃음.

2장.

마찬가지로 ‘여성적인 것’에 대한 편견이 인간 모두에게 적합한 가치를 알아챌 수 없게 만드는 현상에 대해 생각. 덧붙여 이전에 봤던 아래 게시물들도 떠오름(!)

  • Facebook “1973년, 미국 시애틀에서 전기식 AMC 그렘린(Gremlin) 차량을 도로 갓길 충전소에서 충전 중인 모습.” 페이스북 페이지 「오늘의 역사 Today in History」
  • Facebook “영국 사교계의 명사이자 여성참정권 운동가였던 레이디 노먼(Florence Priscilla Norman, 1883~1964, a.k.a. Lady Norman)이 일명 ‘오토패드(Autopad)’를 타고 있는 모습.” 페이스북 페이지 「오늘의 역사 Today in History」

3장.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곤봉과 창이 인간의 첫 번째 도구라고 추정하는 것일까? 이렇게 추정하면 인간 발명의 추동력이 주변 세상을 지배하려는 욕구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믿게 된다. 여성이 서사에서 지워질 때 인류는 본래와 다른 모습이 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더 나아가면 우리는 자신의 본성을 스스로 속이게 된다. 가부장제가 미치는 가장 심각한 영향 중 하나는 우리의 진짜 모습을 잊게 한다는 것이다. / 만약 우리가 여성적인 것으로 코드화한 인간 경험의 측면들을 보편적인 것으로 재인식한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정의가 통째로 변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늘 인간이 남성과 동 일시된다는 점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여성은 갈비뼈로 만든 일종의 부록이 아닌가.“[92]

4장.

“문제는,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컴퓨터를 싫어하게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여성이 컴퓨터를 싫어하도록 사회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모두가, 기술과 여성이 양극단에 있다는 오해를 똑같이 강화한다는 사실이다. / 여성이 컴퓨터 분야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성별을 극복해야 한다는 오해 말이다. / 그러나 75년 전만 해도 컴퓨터는 여성이었다. / 말 그대로.”[131]

5장.

“그동안 우리가 남자아이들을 키워 온 방식은, 다른 무엇보다 ‘여성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자기 안의 모든 특성을 차단하고 거부하고 억압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울지 마,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 마, 꽃 앞에 서서 감탄하지 마.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런 특성들은 전부 인간 삶의 모습이다. / 동시에 우리가 남성에게 허락하지 않는 모습이다.”[162-163].

학교에서 종종 보게되는 모습들. 어떤 어른이 콕 집어 가르쳐서가 아니라, 이미 학습되고 체화된 ‘남성성’을 연기하는 남자-청소년들의 모습을 볼 때 남는 씁쓸함. 

6장.

인플루언서/블로거/헤비 맘카페 유저-공구러에 대한 내 스스로의 편견이 여성혐오적 발상과 맞닿아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불호-비호감인 것과, 그에 대해 어떤 방식의 가치판단을 해왔는지는 별개로 곱씹을 필요가 있는 듯. 다른 한편 이러한 ‘유연성’의 추구 전략이 여전히 여성들이 놓인 처지나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추거나, 깊이 있게 논의할 수 없게 만드는 기제가 되는 문제. 이어 보자면 소위 (비교적) 전통적인 방식의 일자리에서도 ‘풀타임’ 밖의 근무, ‘정규직’ 아닌 계약형태, ‘유연 근무’가 여성들을 지배하는 문제.

7장. 

“유일한 문제는 그 앱들의 다른 한쪽 끝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자꾸 잊는다는 것이었다.” [220]

“결국 이들의 업무는 돌봄이 아니라 기술이 안내하는 개별 업무의 집합에 가까워진다. 이러한 변화로 돌봄 노동자들이 지치는 것도 당연하다. 결국 우리는 알고리즘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시스템은 우리를 그렇게 바라본다. / 이런 식으로 업무를 편성하는 이유는 직원을 교체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222]

“우리는 아직 인간 같은 기계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 대신 인간을 기계처럼 부렸다. /그리고 이를 혁신이라 불렀다.” [225]

─ 쿠팡! 컬리! 아마존! 런드리고! 화물차! 온갖 배달앱!
─ 세상에 돌봄이 이렇게 0.5시간, 1.25시간 하는 식으로 나뉠 수 있다고 상상한다는 그 자체에서 이미 이 앱을 만든 놈들이 단 한 번도 돌봄을 수행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B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로봇이돌봄의 영역까지도 커버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글쎄올시다. 

8장.

“집을 청소하다 보면 매우 다양한 상황을 만나게 된다. 그저 로봇에게 ‘빨래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로봇이 빨래를 하려면 먼저 어떻게 움직일지, 수많은 카메라와 센서로 어디를 가리켜야 할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양말과 바지의 차이를, 빨간색 냅킨과 하얀색 시트의 차이를, 모직과 면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245]

“실제로 로봇은 하늘을 지나는 혜성의 정확한 궤도를 계산하면 했지, 마구 뛰어다니는 세 살 꼬마 한두 명이 식당 내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처리한다. … 우리는 공간 사이를 지나는 법과 서로 무게가 다른 유리잔을 식탁에서 들어 올리는 법을 알며, 바닥의 물기가 곧 미끄러져 넘어질 위험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보고, 기어오르고, 눈앞에 날아오는 공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질 것임을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일의 복잡성을 우리는 당연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체스와 수학은 다르다.” [247]

네 그런데 그래도 저도 로봇청소기는 갖고 싶어요. 건조기도, 스타일러도, 식세기도요. 요즘은 아예 로청 이모님, 식세기 이모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던데 말이요(…)

9~10장.

“한 남자가 일자리를 잃고 난롯가에 앉아 우는 장면에 대한 엥겔스의 묘사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물질에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 엥겔스는 다른 무엇보다 잭이 느끼는 무력함에 초점을 맞춘다. 잭은 남자로서의 자부심과 인생의 방향을 잃었다. 이것이 바로 엥겔스가 독자들이 분개하길 바란 지점이다. / 실제로 많은 독자가 이 지점에서 분개했다. / 잭의 고통은 분명 너무나도 현실적이며, 결코 비웃을 일이 아니다. 이 문제는 폭력과 자살, 비극적 가정사를 낳고, 망가진 자존심과 절망의 악순환 속에서 대대로 이어지는 감정적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남성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젠더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남성 또한 그로 인해 고통받는다.” [276]

아마 누군가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한 순간도 빠짐 없이 모든 게 남성 위주로 돌아갔다고 말하면서 이젠 하다하다 쪼그라진 남성성과 망가진 그네들 자존심까지 어화둥둥 달래줘야 하냐하고 탄식에 빡이 칠 법도 한 고런 포인트가 되겠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지점. 이것이 실제로 빈곤층/저소득 남성의 내면에 자리잡아 사회적 문제를 유발하는 사건들을 우리는 이미 보고 있다

“기계는 저절로 ‘등장’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돈을 지불하고 발명하고 만들고 판매해야 한다. 로봇이 등장하는 것은 우리가 로봇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정치적 차원이 있다.” [296]

“만약 로봇이 노동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면, 그건 우리가 그 결과를 용인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로봇을 어떻게 규제하고 자금을 대느냐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경제에서 이러저러한 것들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298]

“‘쓸모없는 계층’ 수십억 명이 꼭 실업자 패거리가 되어 거리를 배회하며 엘리트들의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훔치고 파손해야 할 필요는 없다. 결국 그런 세상에 살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기술이 불러온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내린 선택의 결과다.” [299]

“동시에 우리는 젠더 관념이 이 세상에 행사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가진 것이 매우 적은 남자들에게 이러한 젠더 역할은 반드시 붙잡아야 할 마지막 확신처럼 느껴질 수 있다. / 경제 정책은 신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기후 변화에 관해 이미 젠더화된 정치 역학을 더욱 악화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 결과는 매우 위험할 수 있다. 남성에게서 스코틀랜드 정유 공장의 고소득 일자리를 빼앗고 불안정한 전화 판매 일거리를 준 다음, 《가디언》을 통해 그들이 갑자기 그레타 툰베리를 싫어한다며 비웃을 순 없다. 이는 분명 비극이지만, 피할 수 있는 비극이다. 여기가 바로 정책이 개입해야 하는 지점이다. 정책을 통해 앞으로 수많은 남성이 지구를 위해 포기해야 할 직업만큼 보수를 제공하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해야 한다. /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에너지 분야의 많은 (이름을 다소 경솔하게 붙인) ‘녹색 일자리’는 보수가 꽤 높을 뿐만 아니라 고학력이 필요하지도 않다. 이처럼 경제를 잘 전환하면 환경에 관심이 많고 도시에 거주하는 진보적 여성과 버려진 공업지대에 사는 백인 남성이 지구의 미래를 걸고 피 튀기는 성 대결을 벌이지 않을 수 있다. /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다. [318-319]

덧붙여서, 케이트 만의 『남성 특권』(2022, 오월의봄)에서 말하는 인셀과 피해자 의식, 김학준의 『보통 일베들의 시대』(2022, 오월의봄) 4장의 불안, 공포, 응어리진 분노의 논의들. 

해제

에서는 하미나 선생이 짚어준 부분이 특히 눈에 띔. 

“저에게는 과학기술학이 좀 더 익숙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페미니스트 진영 안에서 논의되는 어떤 이슈들에서 제가 튕겨 나가게 되는, 공감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종종 생기거든요. 특히 동물권이나 기후 위기에 관한 운동에서 그런 때가 잦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말하는 자연의 개념이나 정의가 저의 것과 다르기 때문인데요. 자연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볼 때 늘 머릿속에 물음표가 생겼어요. 그 관점이 제게 왜 충분하지 않게 느껴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는데,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힌트를 얻었던 것 같아요. … 한쪽은 자연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다른 한쪽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굉장히 다른 태도이지만, 사실은 둘 다 나와 자연을 분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고 지적하지요. 자연과 내가 분리되지 않는다고 여길 때 개입할 여지가 많아지거든요. / 기술 역시 기술결정론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 곧 어떤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막을 수 없는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실행으로 발전의 방향과 속도가 결정된다고 볼 때 개입의 여지가 생기죠.” 

최근에 봤던 여러 사람들의 ChatGPT와의 대화 내용,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들도 떠올랐던 지점. 영화 <아이로봇>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자신들이 만든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의 모순적인 지점. 결국 만든 대로 만들어지는 생산물을 놓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염려하는 것일까? 인간들은 대체 인간을 뭐라고들 생각하고 있는 걸까. 지능을 곧 주체의 가능성으로 직결시켜 버리는 발상에 대한 이질감.

얼마 전 끝난 책모에서도 얘기했던 부분이지만, 사실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조차 아닌 추상적인 대상(그때는 국가)이나 기술 따위를 놓고 “이것을 어쩔 수 없다”거나 “이렇게 흘러갈까 걱정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게으른(?) 혹은 안일한(?) 사고방식인지. 그래서 더욱 ‘선택의 결과’라거나, ‘개입’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부분이 맘에 듦.

댓글을 답시다 두비두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