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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이는 어제오늘 홍대 클럽에 있었다. 상황을 알고도 그랬다. 새벽 4시가 넘자 이태원에서 홍대 클럽으로 넘어온 사람도 있었다. “신나는 노래가 나오고 춤추고 있어서 개념 없어 보이죠? 그 끔찍한 사태를 목격하고도 어떻게 또 클럽으로 가나, 이상하죠? 제가 대화 나눈 사람은 트라우마에 절어 있었어요.” 쪼이는 혼자 집으로 가고 혼자 잠드는 게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아침 9시까지 클럽에 있다가 왔다고 했다. “아마 이태원에서 넘어온 그 사람도 그랬을 거예요.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무개념’, ‘미친놈’들도 물론 있겠지만, 이런 상황을 소화하는 단계와 방식이 다 다르다는 걸 사람들이 많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쪼이의 이런 해석이 우리를 인간으로 다시 묶어준다.
황정은은 1996년 연세대, 2009년 용산, 2014년 세월호를 기억하는 연작소설집 <디디의 우산>에서 이런 문장을 썼다. “내가 그것을 트라우마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어. 우리는 그 장소에서의 경험 자체를 별로 말하지 않았지. 고통스러운 기억이었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같은 걸 겪었으니 다 안다고 생각했으니까.”
우리는 이 사태를 가까이에서 겪은 이들의 하루가 어땠는지, 그날의 신남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온도 차이와 예측 불가능했던 비극이 어떤 자국을 남겼는지 아직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애도는 거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곳에 있고자 했던 욕망 자체를 과녁으로 삼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애도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