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가련한 이여,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족속이여, 지독히도 불운한 자여, 너희는 이런 투쟁들과 탄식 속에서 태어났구나. —엠페도클레스
무페의 서론 몇 자를 읽고 쓴다. 책을 사고 싶다, 꼭.
왜 나는 이제야 이를 읽고 있는가.
어제 할매의 탄생을 읽으며 든 생각 조금을 나누었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이 이후의 읽기가 새로움보다는 되새김에 가까울 것이기에 우선 쓴다.
사랑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더 많이, 더 오래, 더 깊이 남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 대단히 상관이 있어 보이지 않는 그녀의 삶에도 곱씹어보면 대단히 상관있는 흔적들이 가득하다. (그녀의 것뿐만 아니라) 이 수많는 흔적들이 여지껏 ‘발견’되지 않고 있음은 이제는 수치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나이듦의 미덕이란 역시 사람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나 아닌 남을 이해하고 타인의 깊이를 품는다는 것이, 꼭 나를 내세워 본 바 없어서 더 쉬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반성에도 여러 질이 있다. 성찰에도 다 다른 색이 배어난다. 덧붙여. 할매의 말들은 할배의 말들과 많이 다르다.
(이렇게 퉁쳐버리기에는 이 표현 자체를 좋아하지 않지만) 세대론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내 주변의 삶에서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나게 되는지, 얼마나 복잡한 삶의 아픔들이 존재하는지, 한두 다리 건너 아는 이들의 생이 얼마나 버겁고 힘에 겨울 수 있는지, 그 폭도 깊이도 이해할 수 없는 세대가 계속해서 자라난다는 것. 나 아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질 수밖에 없어진다는 것.
근래 큽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본다. 향미의 인생길이 숱한 딸과 숱한 누나와 숱한 아가씨의 그것이었음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남아있는 세상일까 지금은. 착실히 꼰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 요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