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따지고 보면 그가 신앙을 버린 것은 딴 이유보다 그에게 종교적인 기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앙이 밖에서 강요되어 왔을 뿐이었다. 그것은 환경과 범례의 문제였다.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범례를 통해 그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신앙을 간단히 벗어던져 버렸다. 마치 몸에 맞지 않게 된 외투처럼. 비록 깨닫지는 못했지만 신앙이 오랫동안 그를 지탱해 왔던지라, 그것을 버리고 나자, 처음에는 삶이 낯설고 외롭게 보였다. 지팡이에 의지해 오던 사람이 갑자기 지팡이 없이 걷게 된 기분이었다. 낮은 더 춥고, 밤은 더 외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벅찬 감격이 그를 버티게 해주었다. 삶이 더 아슬아슬한 모험으로 여겨졌다. 이윽고, 내던져버린 지팡이, 벗어버린 외투가 오히려 힘겨운 짐이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되었다.
1-2. 필립은 너무 쉽게 믿음을 버린 자신에 놀랐다. 저 깊은 내면에 것들인 본성의 미묘한 작용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을 모르고, 그는 자신이 명석해서 그러한 확실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터무니없이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자기와는 다른 태도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이의 특성 때문에 필립은 위크스와 헤이워드를 적지 않게 업신여겼다. 두 사람 다 자기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막연한 정서에 만족하여 그에게는 명백해 보이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1-3. 따라서 그것에 대한 믿음은 어렵잖게 버릴 수 있었지만, 한 가지 그를 참담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비이성적인 생각이 아니냐고 혼자 말하면서 그런 슬픔을 웃어넘겨 버리려고 하지만, 돌아가시고 나서 세월이 갈수록 그 사랑이 점점 소중하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어머니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억제할 수 없이 눈물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신을 공경하고 믿음이 독실했던 선조들의 영향이 저도 모르게 작용하는 듯, 결국은 전에 믿었던 것이 다 옳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푸른 하늘 저 너머에는 질투심 많은 신이 있어 무신론자를 영겁의 불로 징벌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 때마다 그는 다시 끔찍한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그런 때에는 이성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육체가 겪게 될 영원한 고통을 상상하면서 공포에 질려 식은땀을 흘렸다. 마침내 그는 필사적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곤 하였다.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은 아냐. 억지로 믿을 수는 없어. 결국 신이 존재하여 내가 성실하게 믿지 않았다고 벌을 준다면, 별 수 없는 거지」
2. 필립은 인생의 나그네가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그전에 메마르고 험준한 세상을 얼마나 넓게 돌아다녀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젊음이 행복하다는 것은 환상이며 그것은 젊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환상이다. 하지만 젊은인들은 자기들이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머리에는 끊임없이 주입되어 온 진실없는 이상들만 가득 차 있어 현실에 접촉할 때마다 멍들고 상처받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어떤 공모의 희생자처럼 보인다. 선택해서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제나 이상적인 책들, 그리고 망각의 장밋빛 아지랑이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는 나이든 사람들의 대화, 이 두 가지가 공모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비현실적인 삶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자기가 읽은 모든 것, 자기가 들은 모든 것이 거짓말투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여야 한다. 그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은 인생의 십자가에 그들을 때려박는 못이 된다. 이상한 것은 쓰라린 환멸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무의식적으로 저마다, 억제할 수 없는 내부의 어떤 큰 힘에 의해 그 환멸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4. 「사람은 자신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환상을 너무 철썩같이 믿고 있어. 그래서 나도 그걸 쉽게 받아들이고 마네. 나는 내가 자유로운 행위자인 것처럼 행동하지. 하지만 어떤 행위가 이루어질 때는 우주의 모든 힘들이 저 영겁에서 함께 작용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분명해.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지. 그건 필연이니까. 선한 행위였다 해도 난 공적을 주장할 수 없고, 나쁜 행위였다 해도 난 비난받을 수 없네.」
5. 「난 나 자신만을 위해 말하네. 타인은 내 행위를 제약하는 존재들로서만 인식하지. 그야 세상은 그 하나하나의 타인을 중심으로 하여 돌기도 하지. 누구에게나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야. 타인에 대한 나의 권리는 내 힘이 미치는 범위에 국한되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능력이 미치는 데까지일 수밖에 없네. 인간은 군집성이라 사회를 이루어 살고, 사회는 강제력을 수단으로 유지되고 있지. 강제력이란 무기의 힘――그게 경찰이지――과 여론의 힘――그게 미세스 그런디일세――그 두 가지 힘을 말하네. 한편엔 사회가 있고 다른 편엔 개인이 있네. 두 가지가 다 자기보존을 추구하는 유기체지. 힘과 힘이 맞서 있어. 나는 홀로 서서, 어쩔 수 없이 사회를 받아들이지만, 그게 반드시 싫은 것은 아니야. 왜냐, 내가 세금을 바치는 대신 사회는 약자인 나를, 나보다 강한 자의 폭압으로부터 보호해주거든. 하지만 내가 사회의 법에 복종하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야. 난 법의 정의를 인정하지 않아. 난 정의를 몰라, 권력만을 알 뿐이지. 그리고 내가 나를 보호하는 경찰에게 봉급을 지불한다면, 그리고 징병제도가 시행되는 나라에 살기 때문에 내 집과 땅을 침략자로부터 지키는 군대에 복무한다면, 나와 사회는 서로 빚이 없는 거지.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난 사회의 힘에 내 꾀를 써서 대항하는 거네. 사회는 자기보존을 위해 법을 만들고, 내가 그 법을 어기면 날 가두거나 죽이지. 사회는 그럴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럴 권리가 있어. 내가 법을 어기면 국가의 보복을 받겠지만, 난 그걸 벌로 간주하지 않고 내가 악행을 저질렀다고 느끼지 않을 걸세. 사회는 명예심이라든가, 재물이라든가, 사람들의 평판이라는 것들로 내가 사회에 봉사하도록 유혹하지. 하지만 난 사람들의 평판 따윈 관심도 없고, 명예를 경멸하고, 재산이 없어도 아주 잘 지낼 수 있다네.」
6. 「그건 불가능해. 자네도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거야. 세상을 살만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선 필요한 일은 인간의 불가피한 이기성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자넨 타인에게 이기적이 아니기를 요구하는데 그건 자네의 욕망을 위해 타인더러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라고 하는 모순된 주장이야. 타인이 왜 그래야 하나. 모든 개인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자신을 위한다는 사실을 자네가 받아들여야 자넨 다른 사람들에게 덜 요구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덜 실망할 거고, 다른 사람들을 더 자비롭게 바라볼 수 있어. 사람은 인생에서 단 한 가지를 추구하지. 그건 자기 자신의 쾌락이야.」